정조 12년(1788년) 11월, 충청도 연산의 계모임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났다. 최옥함과 석초득이 다투다가 취중에 최옥함이 석초득의 손가락을 물었는데, 그만 뼈가 부서지고 엄지와 새끼손가락이 썩으면서 독기가 온 몸에 퍼져 석초득이 죽게 된 것이다. 물론 손가락을 문 정도가 아니라 무릎으로 가슴을 가격하는 등 구타가 있었다는 증언이 있었지만 확실치 않았다.
당시 충청도 관찰사는 사건 정황을 볼 때 손가락을 물린 정도가 그다지 심하지 않았고, 법에 비추어 봐도 최옥함이 사형에 처할 만큼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고 보고했다.
복수로 가득 찬 조선
이듬해 정조는 충청도 관찰사와 형조의 의견을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손가락의 독기가 어떻게 배와 어깨까지 침투할 수 있겠습니까?’ ‘흘러나온 고름이 어떻게 배에 들어갈 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라는 경들의 논리는 매우 분명하다. 뿐만 아니라 ‘시장(屍帳:시신의 검시 내역)의 상처와 석초득의 친인척이 진술한 내용이 서로 일치하지 않고 살인사건의 정황에도 맞지 않다. 둘 중 하나만 어긋나도 살려주어야 하는데, 두 가지 모두 문제가 있으니 어찌 사형을 내리겠는가. 최옥함을 특별히 석방하도록 관찰사에게 분부하라.”
정조는 시신의 증거와 관련자의 증언을 믿을 수 없다고 보았으며, 사건 보고서를 읽어봐도 최옥함을 사형에 처할 만한 어떤 근거도 발견하지 못하자 최옥함을 풀어주었다. 죽은 섣초득의 아들 석치규는 분을 참지 못했다. 아버지를 때려 죽음으로 몰아넣은 최옥함이 살인죄가 아닌 단순 폭행 정도의 처벌만을 받고 풀려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1년이 지난 1790년 사단이 일어나고 말았다. 석치규가 최옥함을 칼로 찔러 그 자리에서 살해한 것이다. 최옥함의 시신을 조사한 결과 어깨뼈와 늑골, 그리고 옆구리에 칼자국이 선명했다. 심지어 내장이 다 드러날 정도였다. 관찰사는 정조에게 이렇게 글을 올렸다.
“부모의 원수를 갚겠다는 생각을 잠시도 잊지 않고 있다가 칼로 찔렀으니 원수를 갚는 행위는 용서할 만합니다. 또한 멋대로 살인한 죄를 적용하기도 어려울 듯합니다.”
충청도 관찰사는 부모의 원수를 갚은 복수 행위는 물론이거니와 제멋대로 살해한 경우 처벌한다는 조문도 적용하기 어렵다고 보았다. 아버지의 원수 최옥함을 살해한 석치규의 살인을 의로운 복수로 인정해 처벌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그해 9월 정조는 관찰아의 의견에 같은 하교를 내렸다.
“최옥함의 죄를 감하려 했던 이유는 그가 석초득을 살해했다고 보기 힘든 단서가 나왔기 때문인데, 이제 석치규의 복수 사건이 벌어졌다. 그런데 관아에 나와 신고한 석치규의 행위나 죄인의 범죄사실 진술서를 보면 사실관계가 명확하고 정당한 것뿐이었다. 재판할 때는 구체적인 법조문이 없다 해도 참작해 판결할 수 있는데, 이렇게 법조문에 명백한 근거가 있으니 말해 무엇하겠는가. 석치규를 즉시 풀어주도록 하라.”
정조는 아버지를 죽인 최옥함이 풀려나다 그를 복수 살해한 아들의 의리를 높이 샀다. 이런 식으로 사적 복수가 허용되고 폭력이 넘쳐나게 되자 조선 후기의 많은 지식인들이 이를 우려하였다.
정조의 판결을 비판한 성해응
당시 성해응(1760~1839)이라는 학자는 <복수를 논함>이라는 글을 지어 판결의 부당함을 통렬히 비판했다. 그는 살인자 석치규가 아비의 원수를 갚았으므로 용서할 수 있다고 본 충청도 관찰사의 견해를 문제 삼았다. 물론 이러한 비판은 정조의 판결에 대한 지적으로 이어졌다. 법적인 절차를 밟지 않고 사적으로 폭력을 휘두른 석치규의 만행이 용납되어서는 안 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 정조 임금께서 덕이 많고 인자하시어, 중죄인을 심리할 때마다 수라를 거르시며 밤에는 촛불을 밝히시어 여러 차례 따져 보셨다. 또 범죄와 관련된 모든 상항을 살펴 책임 소재를 면밀히 확인하셨으며 남은 흔적을 살펴보신 뒤에 올바로 판결하셨다. 이로 인해, 죽은 사람의 원한을 풀어주셨고 살아있는 사람이 억울한 일을 당하지 않게 하셨다. 최옥함을 석방한 것은 그가 석초득을 살해했다고 보기 힘든 단서가 나왔기 때문이며, 석치규를 용서한 것은 그의 효심을 높이 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는 임금께서 가지신 큰 권한을 행사한 것이므로 관리들이 이 판결에 참고해서는 안 된다. 대개 살인 사건을 정리해서 보고하면 이를 토대로 임금께서 판결하는 것인데, 조금이라도 살려 줄만한 여지가 있었기에 살려 준 것이다. 그런데도 석치규는 옥함이 깨물었기 때문에 아비가 죽었다고 생각헤 경솔히 살해했으니, 담당 관리들이 논의를 거친 후 임금이 내린 최종 판결을 수긍하지 않은 것이다. 누구나 이렇게 행동한다면 이 나라에 어찌 법이 있다고 하겠는가?
성해응은 정조가 죄의유경(罪疑惟輕 죄상이 분명하지 않아 가볍게 처벌함)을 근거로 최옥함을 용서한 것인데, 이를 무시하고 마음대로 최옥함을 살해한 최치규를 마땅히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정조는 석치규의 행위를 용서했다. 물론 왕은 이번 사건처럼 특수한 상황에서 임시로 정당성을 부여할 수 있는 지위이다. 하지만 공적 절차를 무시한 채 사적으로 복수한 석치규의 행위를 왕이 인정하는 바람에, 백성들이 법을 지키기보다는 사적 폭력을 휘두를 위험성이 커져버렸다.
이에 성해응은 억울하다면 법에 호소해 공적인 처벌을 요구해야지 자기 맘대로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마음에 쌓인 원한 때문에 원수의 가슴을 찌른 서원경은 측천무후가 다스리던 시절에, 아버지를 죽인 지방관에게 복수한 뒤 자수했다. 당나라 말 양열은 아버지를 죽인 원수 전고를 죽인 뒤 자수하자 관에서 정상을 참작해 사형을 면하고 장 100대를 친 뒤 먼 곳에 유배를 보냈다. 이와 같은 행위라면 후대에서 판결에 참고할 만하다. 하지만 석치규가 복수한 것처럼 어버이의 죽음에 대해 외옥함의 자녀가 복수하려고 나선다면, 그 혼란을 어떻게 막을 수가 있겠는가? 성해응은 다음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고 보았다.
“<주례>는 ‘복수하려는 자가 먼저 관청에 알리며 무죄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한유는 ‘만약 외롭고 힘없는 이가 작은 뜻을 품고 원수의 틈을 노리는 경우, 관아에 고하면 복수할 수 없을까 우려하였다.’ 즉 약자가 관에 복수를 알린 뒤에는(원수가 이 사실을 알고 먼저 죽일 수 있기에) 원수에게 복수할 수 없게 되므로, 약자의 경우에는 관에 보고하지 않고 복수할 수 있도록 예외를 인정한 것이다.그렇다면 과연 석치규가 이런 약자에 해당되는가? 전혀 그렇지 않다.”
“복수하려는 자가 비록 외롭고 힘이 없다 해도 무기를 들고 기다린다면 원수를 갚으려고 마음을 다해 떨쳐 일어난 큰 사내일 터이다. 사실상 적에 맞설 수 있는 장부라 할 것이다. 하물며 석치규처럼 덩치가 큰 자는 오죽하겠는가?”
성해응은 석치규를 절대 용서할 수 없다고 보았다. 석치규가 최옥함을 관아에 고발해 공적 절차를 밟지 않았을 뿐 아니라, 복수의 예외조건인 약자에 해당되지도 않는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결국 성해응은 석치규가 복수한 행위는 법을 어긴 살인 행위일 뿐이라고 결론짓고 자신의 뜻을 분명히 밝혔다.
“나는 법을 집행하는 자들이 이런 판결을 일반적인 경우에 모두 적용할까 두렵다. 때문에 이 글을 서서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뜻을 밝힌다.”
다산의 판단은?
다산은 무조건 복수를 금지하지는 않았다. 대신 복수의 조건을 엄격하게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예를 들어 갑이 을의 아버지를 죽였다면 을은 갑을 죽일 수 있을 뿐 갑의 아버지를 복수 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실 다산의 복수론은 중국 당나라의 하자이자 정치가였던 유종원의 복수론에 토대한 것이다. 다산은 원칙을 강조했지만 그렇다고 상황을 전혀 무시한 것은 아니며, 상황을 유연하게 헤아려야 하지만 원칙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였다. 결국 다산에게 올바른 판단이란 경(經 원칙)과 권(權 상황에 따른 융통성)을 고려하는 것, 즉 시중을 잃지 않는 것이었다.
<정약용, 조선의 정의를 말하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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