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여학생들에게 늘 이런 말씀을 드립니다. 배우자를 고를 때에는 저 친구가 지금 얼마나 멋있는지를 보지 말고 쉰 살 때 쯤 어떤 모습일지를 상상해 보라고 말입니다. 그때도 멋있을 것 같은 남자라면 고르라는 말씀을 드립니다. 진짜 승부는 그때 오니까요.
2015년 3월 2일 전남도립대학교 입학식 축사
이낙연은 어느 날 동생 계연에게 진지한 얼굴로 난데없는 지침을 내린 적이 있다.
“차례 자세를 하고 상방 15도로 봐야 한다.”
결혼 상대를 고를 때 적용하라는 얘기다. 상대가 너무 돈이 많아 손을 벌리리고픈 유혹이 생겨도 안 되고, 너무 가난해 월급을 줘야 할 상황도 아니고, 적당히 15퍼센트쯤 잘 살면 좋겠다는 얘기였다.
이는 동생 뿐 아니라 자기 자신과 더 굳게 다짐한 말이었다. 서울법대 출신으로 잘 나가는 신문사의 기자인데다가 키도 훤칠하니 중매가 제법 들어왔다. 그 중에는 잘 사는 집, 잘 나가는 집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이낙연이 찾는 ‘상방 15도’ 위치에 있는 상대는 보이지 않았다. 소개를 받으면 슬쩍 이 질문을 던져 보았다.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않은 사람을 보면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단골 맥줏집 아주머니가 소개한 그녀에게도 똑같이 물었다. 그녀가 의외라는 듯 되물었다.
“그걸 왜 물으시는지요?”
“실은 제 가족이 그렇습니다.”
“전 그런 데 대한 편견이 없는 사람입니다.”
학교를 다니지 않은 사람에 대한 편견이 없다고 대답한 그녀가 바로 이낙연의 부인 김숙희다.
이화여대 미슬대학을 나와 미술교사를 하던 김숙희는 1980년 4월 어느 날 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선을 보러 나갔다. 그날은 봄비가 내렸다.
“만나기로 한 한국일보 13층에 가니 선보는 사람들로 가득했어요. 우산이 없어 비를 맞으며 도착했는데, 소개해 주는 두 분과 한 남자가 앉아 있어요. 삐쩍 마른 샌님 같은 인상이었어요. 그날은 저도 급작스럽게 나오게 돼서, 별 말도 않고 시큰둥한 태도로 있다가 먼저 일어나겠다고 했지요. 며칠 뒤 미안한 마음이 들더라고요. 명함 받아둔 게 기억나서 신문사에 전화를 걸었죠. 차라도 대접하겠다고 하려고요. 그런데 ‘여보세요’라며 전화를 받는데 목소리가 참 좋은 거예요.”
두 번의 만남은 신문사 근처의 다방에서였다. 우연히 동석하게 된 이낙연의 친구까지 셋이서 밥을 먹었다. 친구와 나누는 대화를 들어보니 이낙연의 괜찮은 구석들이 보였다. 덜렁대고 실수투성이였던 김숙희는 꼼꼼하고 논리적인 상대가 마음에 들었다.
스물여섯과 스믈아홉. 꽃피는 청춘이었다. 계절도 개나리, 벚꽃, 진달래, 봄꽃이 연달아 피는 봄날이었지만 눈앞에 닥친 현실은 내내 겨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5월에는 도저히 믿기지 않은 소식들이 광주에서 들려왔다. 동아일보 수습기자였던 이낙연은 밤마다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시국에 대한 울분을 삭였다. 그 자리에 김숙희도 함께 있었다.
다섯 번 쯤 봤을까. 결혼에 소극적이던 이낙연도 마음을 열었다. 한 인터뷰에서 당시의 만남을 이렇게 회고했다.
“어떤 사람인지 나와 잘 맞는 사람인지 궁금했는데 몇 번 만나는 동안 유심히 관찰해 보니 너무 괜찮은 사람인 것 같았습니다. 정말 궁합이 잘 맞는다는 게 느껴졌어요.”
배우자를 고를 때 이낙연은 어머니를 잘 모실 후덕한 며느리라면 좋겠다 생각했다. 이 여자라면 그 역할을 잘 하겠다 싶었고, 50대에 더 멋질 거란 확신도 들었다. “배우자를 고를 때에는 저 친구가 지금 얼마나 멋있는지를 보지 말고, 쉰 살 때쯤 어떤 모습일지를 상상해 보라”는 말은 그의 경험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결혼 날짜는 11월로 잡았는데, 고민이 생긴 거예요. 둘이 매일 밥 먹고 맥주 마시고 11시쯤 되어서는 택시 잡아 나를 반포에 내려주고 자기는 하숙하던 옥안동으로 돌아가고 그러다보니 데이트 비용에 돈을 다 쓰게 된 거예요. 고향에도 돈을 보내야 했을 테니 힘들었겠지요. 그래서 결혼을 앞당겨 8월에 하게 됐어요. 결혼하면 데이트 비용을 줄일 수 있으니까. 저는 그런 솔직함이 좋았어요. 돈이 없다고 꾸밈없이 말하는 거. 그러면서 모든 건 자기가 책임지겠다는 남자다운 태도가 마음에 들었어요.”
만난 지 넉 달 만인 1980년 8월 신문회관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친구에게 돈을 빌려 봉천동 꼭대기에 300만 원짜리 전셋집을 구했다. 결혼한 지 2년만에 아이가 태어났다. 이낙연은 지금까지 가장 행복했던 순간으로 이때를 꼽는다.
“1982년 제 아들이 태어나 제가 아버지가 됐을 때입니다. 제가 드디어 어른이 됐다는 어리둥절한 실감. 아들이라는 한 인간의 일생을 책임져야 한다는 벅찬 의무감. 한 생명을 낳고 탈진해 누워있는 아내의 숭고한 헌신을 보는 남편으로서의 애잔한 마음 등등 무엇이라 형언할 수 없는 감동에 온몸이 떨렸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소녀가 자라 엄마가 되는 변화보다는 크지 않겠지만, 저로서는 그날이 제 인생의 가장 큰 변화였다고 생각합니다.”(<시민의 소리> 인터뷰 2013.4.2.)
같은 해에 처음으로 13평짜리 아파트를 사서 내집 마련의 꿈도 이뤘다. 정치부 기자로 쉴 틈 없이 보내는 사이 아이는 부쩍 부쩍 자랐다.
두 사람 모두 전시회를 가거나 영화 보러 다니는 것을 좋아했지만 그것도 점점 쉽지 않은 일이 되었다. 1990년에는 이낙연이 도쿄 특파원으로 발령이 나자 김숙희는 학교를 그만두고 일본으로 함께 건너갔다. 2000년 이낙연이 정치로 발을 들여놓자 김숙희는 남편의 활동을 도우며 정치인의 아내로 살아왔다. 그러다가 결혼 루 33년이 지난 2013년 8월에서야 김숙희는 서울 종로구 인사동 갤러리에서 생애 첫 개인전인 ‘꽃이 있는 풍경’전을 열었다. 붓을 접고 살다가 3년여간 준비한 작품을 세상에 내놓은 것이다. 이런 아내에게 남편은 표현을 잘 못 하지만 늘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다.
“아내는 매사 긍정적입니다. 살다 보면 걱정거리도 있고 견디기 힘든 시기도 있는데 그때마다 이 사람이 위로해 준답시고 옆에서 몇 마디 하면 정말 신기하게도 버티게 돼요.”
“남편은 걱정을 앞당겨서 하는 사람입니다. 그만큼 세심하고 안정적이죠. 둘이 성격이 정말 달라요. 우리 부부는 그렇게 달라서 살 수 있을지도 몰라요.”
결혼 3년 차까지는 사소한 말다툼을 하곤 했지만 이후론 부부싸움 한번 없이 지내왔다. 2020년에는 벌써 결혼 20주년을 맞는다.
“믿기지 않아요. 벌써 40년이 됐다니. 매사에 철저하니까 살면서 힘든 부분도 있지요. 제가 남편과 같이 일하는 분들에게 위로를 드릴 때마다 이런 얘기를 해요. ‘힘드시죠? 그래도 저처럼 평생 같이 살지는 않잖아요?(웃음) 제가 소개받고 두 번째 만났을 때 이 사람 참 진국이구나 했는데, 지금도 똑같이 생각해요. 무엇보다 책임감이 강한 괜찮은 남자입니다. 40년 봐왔지만 남편과 아버지가 아닌 시아버지, 할아버지 이낙연의 모습은 또 달라요. 손자 손녀 사랑도 대단하고요. 며느리도 얼마나 이뻐하는지 모릅니다. 말수가 적으니 재미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툭 던지는 유머에 많이 웃어요. 예전에 10년 넘게 쓴 텔레비전이 고장 나서 새로 사다 놓은 적이 있어요. 신나서 남편이 오자마자 뭐 달라진 거 없냐고 물었는데 모르겠다고 하는 겁니다. 서운하다고 투덜거렸더니 대뜸 이러드라고요. 집에 들어오면 내 눈에 당신 밖에 안 보이는데 어떻게 해!”
글 이제이 <다름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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