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께서는 생전에 스스로를 봉화산 같은 존재라고 표현하셨습니다. 연결된 산맥이 없이 홀로 서 있는 외로운 산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대통령님은 결코 외로운 산이 아닙니다. 대통령님 뒤에는 산맥이 이어졌습니다. 이미 봉화산은 하나가 아닙니다. 국내외에 수많은 봉화산이 솟았습니다.
2019년 5월 23일 고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0주시 추도사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0주기이던 그날, 나는 노무현과 이낙연이 하나의 산맥으로 이어져서 결국 역사가 되어가고 있음을 목격했다. 이낙연은 봉화산을 마주하고 서 있었다. 바로 눈앞에는 노란 물결이 일렁이고 있었다. 추도사의 구절처럼 저마다 봉화산이 된 시민들. 가슴에 ‘사람 사는 세상’이라는 글씨가 적힌 노란색 티셔츠를 입고 있는 시민들이었다.
추도사를 하는 총리의 뒷모습을 나는 무대 뒤편에서 바라보고 있었다. 그 뒷모습에서 깊은 회한을 느꼈다. 노무현이라는 이름 앞에서 어떻게 그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낙연과 노무현의 인연은 정치를 하면서 시작됐다. 이낙연은 초선 국회의원이었고, 여당인 새천년민주당 대변인이었다. 노무현은 김대중 정부에서 해양수산부 장관을 지낸 뒤 2002년 국민경선제를 통해 새천년민주당의 제16대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두 사람은 16대 대선에서 후보자와 선관위 대변인으로 같은 배를 탔다.
이낙연이 대변인 시절 남긴 유명한 말 “지름길을 모르거든 큰길로 가라. 큰길도 모르겠거든 직진하라. 그것도 어렵거든 멈춰 서서 생각해 보라.”는 노무현 후보를 엄호하는 과정에서 나온 말이었다. 대선을 앞두고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이 떨어지자 후보 교체를 요구하며 당을 떠나는 이들을 향해 던진 일침이었다. 또한 이낙연 내면의 뚝심을 드러낸 표현이었다.
노무현과 이낙연 두 사람은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던 순간들을 함께했다. 16대 대통령 선거는 하루 전날 밤까지 반전의 반전을 거듭했고, 2002년 12월 19일 선거 결과 노무현은 마지막 승자가 되었다. 대통령 당선인이 된 노무현 곁에도 이낙연은 대변인으로 동행했다. 이낙연은 ‘인생에서 가장 충실하고 치열했던 기간이었다’고 이 시절을 회상했다.
“저는 행복한 대변인이었습니다. 대변인으로 뛰었던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했습니다. 그렇게 탄생하신 당선자의 대변인으로 계속 일했습니다. 대통령 취임사를 최종적으로 다듬어드렸습니다. 대통령께서 취임사를 낭독하시고 청와대로 들어가셨습니다. 대변인으로서 더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광주서중 일고 동창회보 2003. 3.20)
노무현은 이낙연을 신뢰했고 좋아했다. 취임사 준비에서 그 믿음은 더욱 굳어졌던 듯하다. 참여정부에서 연설비서관으로 일한 강원국 씨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당시 취임준비위원은 7명이었습니다. 노 전 대통령은 취임사를 돌아가며 쓰게 하였는데, 더 마음에 안 들어 하셨습니다. 구술도 여러 차례 하셨어요. 마지막에 결국은 이낙연 총리가 팬을 들었는데, 바로 한 자도 안 고치고 ‘오케이’ 하셨어요. 그 글을 보니 알 수 있었습니다. 대통령께서 하고 싶은 말씀이 무엇이었는지, 경이로운 경험이었습니다. ‘보통 사람이 아니구나!’ 했습니다.” (한겨레 신문 인터뷰 2003년. 3. 20)
노무현은 이낙연에게 청와대로 같이 들어가자고 강력히 요청했다. 그러나 이낙연은 거절했다. 대선은 승리로 끝났지만 대선 과정에서 후보 교체를 중심으로 불거진 신주류와 구주류 간의 갈등이 끝나지 않았고 결국 2003년 당은 둘로 갈라지고 말았다. 새천년민주당 탈당파 등이 주축이 되어 열린우리당을 창당했다. 노 대통령은 두세 차례 사람을 보내 이낙연에게 열린우리당 합류를 권했다. 그러나 이낙연은 흔들리지 않았고, 이른바 ‘꼬마 민주당’을 지켰다. 훗날 이낙연은 이때의 상황에 대해 신당행을 만류하는 어머니의 뜻을 따랐다는 얘기를 한 바 있다.
분당으로 야당이 된 새천년민주당은 한나라당이 주도한 탄핵에 동조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국민들이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을 압도적으로 지지해줄 것을 기대한다.”라고 발언한 것을 두고 “공무원의 중립 의무 위반”이라며 문제 삼아 탄핵 계획을 밝혔다. 야 3당의 공조로 탄핵소추안 찬반투표 결과는 압도적인 찬성이었다. 재적의원 271명 중 195명 의원이 투표에 참여한 결과, 찬성이 193명 반대 2명이 나왔다. 이때 반대표를 던진 두명의 의원이 누군가에 대해 자연스럽게 시선이 쏠렸다. 한 사람은 자민련의 김종호 의원이었고, 다른 한 명이 이낙연이었다. 당론을 거스르고 의리를 지킨 것이다.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하지만 잘못된 것이라는 이낙연의 소신을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노무현 대통령 탄액안 통과 이후 후폭풍은 대단했다. 국민들은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와 ‘탄핵 반대’를 외쳤고 탄핵을 추진한 세천년민주당은 거센 역풍을 맞았다. 2004년 17대 총선은 열린우리당의 과반의석 차지로 마무리됐다.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 기각으로 노 대통령은 직무에 복귀했고 정국은 급반전했다. 그 소용돌이에서 이낙연은 몇 안 되는 민주당의 당선자였다. 최충규 전 보좌관의 회상이다.
“처음에는 출마 안 한다고 해서 지역 당원들이 우리는 뭐냐고 난리가 났어요. 여론 조사를 하면 상대는 50퍼센트 넘고 이 총리는 20퍼센트대니까 판세도 불리했죠. 그런데 나중에 이걸 뒤집었어요. 제일 힘든 선거가 그때였어요. 그 선거에서 전국 299석 중 민주당은 망해서 전국 9석이에요. 당선 확정돼서 꽃다발 걸어주는데 웃질 않아요. 이 의원이 당선 소감을 하면서 ”나는 이겼지만 민주당은 졌다. 참담하다.“라고 짧게 밝혔던 걸로 기억해요.”
17대 의원이 된 이낙연은 다시 자신의 역할에 집중한다. 새천년민주당 원내대표와 사무총장 등을 역임하며 집권당인 열린우리당과 노무현 정부에 쓴소리를 주저하지 않았다. 격동의 역사이자 앞날을 알 수 없는 정치의 역설이었다.
세월이 흘러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2017년 10월 19일 이낙연과 노무현은 만났다. 서로가 산 자로 만난 것이 아니었다. 이낙연은 총리가 되었고 노무현은 고인이 되어 있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8주기에 해당되던 해 봉하마을을 찾은 이 총리는 묘역에 참배한 뒤, 차마 할 수 없었던 속내를 털어놓듯 방명록에 이런 글을 나겼다.
“나라다운 나라로 사람 사는 세상 이루겠습니다. 사랑하는 못난 이낙연.”
뜨거운 눈물이 담긴 애도였다.
그리고 2년 뒤 10주기 추도사에서 그 아픈 고백을 이어갔다.
“대통령님은 저희가 엄두 내지 못했던 목표에 도전하셨고, 저희가 겪어보지 못했던 좌절을 감당하셨습니다. 그런 대통령님의 도전과 성취와 고난이 저희에게 기쁨과 자랑, 회한과 아픔으로 남았습니다. 그것이 저희를 봉화산의 산맥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런 모든 과정을 통해 대통령님은 저희에게 많은 것을 남기셨습니다. 희망과 고통을, 그리고 소중한 각성을 남기셨습니다.”
10주기 행사를 모두 마치고 봉하마을을 떠나는 길, 엄청난 인파가 그에게 반가움을 표했다. 이 총리가 지나가자 시민들은 박수치며 아이돌 스타처럼 그에게 환호했다. 햇볕이 뜨겁게 내리쬐던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0주기. 노란 물결이 일렁이던 봉하마을은 축제 분위기였다. 아픔이 서서히 아문 시간의 변화가 만들어낸 풍경이었다.
이낙연은 바로 그 비통과 희망의 교차로에서 자기가 어디로 발을 내딛어야 할지 깊이 생각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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