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김대중 대통령님처럼 위대하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당신의 길을 함께 걸었고, 당신의 꿈을 함께 꾸었으며, 당신의 아픔을 함께 아파했습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행운입니다.
<2017년 12월 7일 김대중 대통령 노벨평화상 수상 17주년 기념식 축사>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이낙연의 인생에 나침판과도 같은 존재였다는 것은 이낙연의 여러 말과 글에서 쉽게 확인된다. 김 전 대통령은 해도가 없는 바다에서 항해를 위한 방향타였다.
이낙연과 김대중의 인연은 사실 몇 줄로 정리할 수 없는 수준이 아니다. 그럼에도 몇 줄로 요약하라면 위의 글이 유효한 단어가 되지 않을까 싶다. 우리라는 주어를 이낙연이 주체인 나로 바꾸어보면 말이다.
“나는 당신과 함께 걸었고, 당신의 꿈을 함께 꾸었으며, 당신의 아픔을 함께 아파했습니다. 그것이 나의 행운입니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은 197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 이낙연은 서울대 법과대학 신입생이었고 40대의 김대중은 처음으로 대통령 선거에 도전했다. 야당인 신민당의 후보를 가르는 마지막 결선투표에서 김대중은 김영삼을 제치는 대역전극을 펼쳤다.
선거를 목전에 둔 1971년 4월 18일 장충단 공원에서 김대중은 독재로 치닫는 박정희 정군을 향해 열변을 토했다. “이번에 우리가 집권하지 못하면 박정희 씨의 영구집권 총통 시대가 온다.”라며 ‘유신시대’를 예언했다. 엄혹한 냉전시대에 파격적으로 미‧중‧일‧러 4대극 보장에 의한 한반도 평화통일을 주장했다. 향토 예비군제 폐지, 지방자치제 도입, 부유세 신설을 공약하기도 했다. 장충단에 몰려든 100만 인파 가운데는 청년 이낙연도 있었다. 이낙연은 김대중을 먼발치에서 바라볼 뿐이었지만 이미 그와 같은 길에 서 있었다.
그로부터 17년이 지난 1987년. 그때야 두 사람은 직접 대면했다. 이낙연은 동아일보 정치부 기자가 돼 있었고, DJ는 평민당의 총재가 되어 대통령선거에 두 번째로 도던장을 냈다. 독재정권 아래 가택연금 6년 반, 감옥에서 보낸 세월이 5년 반, 국외로 쫓겨나 3년을 지낸 뒤였더. 사형선고까지 받기도 했다. 그런 고난을 딛고 재차 대통령 후보로 나선 것이다. 이낙연은 DJ의 전담 기자가 되어 전국 순회유세를 함께 다녔다. 정치의 깊은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께서 야당 총재 하실 적에 승용차로 이동하시는 경우에 때로는 당신 옆자리에 제가 앉는 것을 허용해 주셨습니다. 그때 운전을 하셨던 분이 김대중 총재님의 마음을 아셨는지 빈 차에 저를 태워주셨어요. 그러면 김대중 총재께서 ‘누가 주인 허락도 없이 먼저 탔는고?’라고 하시면서 타세요. 그래서 얘기도 쭉 해주시고 때로는 그냥 제가 옆에 있는 것과 관계없이 주무시기도 하시고, 얘기를 참 많이 해주셨죠.” (CBS 라디오 <김현정의 뉴스쇼> 인터뷰 2020. 1.3)
1987년의 대통령 선거는 노태우 후보와 이른바 야권 3김 후보들.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이 격돌했고, 전국적으로 선거 유세 열기는 뜨거웠다. 이낙연은 DJ의 광주 조선대 연설을 ‘유채밭 같다.’라고 보도했다.
“이날 청중들은 오후 1시경부터 운집하기 시작, 주최 측이 나누어준 태극기와 노란색의 김 후보 상징 수십만 장과 역시 노란색 바탕의 김 후보 피켓 수천 개를 흔들며 계속 김대중 만세 등을 연호했고 특히 김 후보가 도착한 후부터는 거의 몇 초 간격으로 함성과 함께 깃발 등을 흔들어 운동장 안팎은 끝없이 펼쳐진 유채밭을 방불케 하기도.” (동아일보 1987.12.7.)
‘유채밭’이라니. 이낙연의 표현에 드물게 등장하는 문학적 상징어다. 이게 기사라는 점을 떠올리면 더 놀랍게 다가온다.
13대 대통령 선거 결과는 민정당 노태우 후보의 승리였다. 대통령 직선제를 얻어냈지만 민주세력은 분열했고, 무릎 꿇었다. DJ는 이때 단일화를 이루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후회했다.
이낙연은 텅 빈 동교동 자택 응접실에서 망연하게 창밖을 바라보던 DJ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도해 수많은 DJ 지지자들을 울렸다. 취재기자와 취재대상으로 만났지만 두 사람은 거리를 둘 수 없었다. 같이 기뻐했고 같이 아파했다.
그러다가 2년 뒤 DJ는 이낙연에게 정치를 해보라고 긴급 제안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이낙연은 도쿄 특파원을 택했고 3년 넘게 일본을 배우고 와서는 국제감각을 연마한 중견 언론인이 되어 있었다. 그로부터 10년 뒤 이낙연은 DJ의 제안을 받아들여 2000년 16대 총선에 출마해 고향인 함평‧영광 지역의 국회의원이 되었다.
DJ는 네 번째 도전한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해 1998년 제15대 대통령으로 취임했고, IMF 외환위기를 극복하며 IT 강국, 복지국가로 가는 발판을 마련했다. ‘김대중‧오부치 선언’으로 한일관계 전환점을 마련했고, 분단 55년 만에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끌어냈다. 그의 햇빛정책은 한반도에 화해와 협력, 평화의 기운을 움트게 했다. 가시밭길 같은 삶을 살아왔지만, 용서와 화합의 정치를 펼쳤다. 그해 12월 노벨평화상 주인공은 김대중 대통령이었다.
이낙연은 DJ의 모든 것을 예의주시했다. DJ의 정치, 철학, 일하는 방식, 사람과 삶을 대하는 태도 등등을 이해했고 공감했고 닮으려 했다. 이낙연에게 김대중은 ‘큰 바위 얼굴’ 같은 존재였다. 그는 특히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이라는 절묘한 균형’을 배우고 싶다고 했다.
2009년 8월 18일 DJ는 85세로 삶을 마감했다. 고난의 길이었지만 존경을 받는 지도자의 마지막 길이었다. 당시 농림수산식품위원장을 맡아 맹활약하던 이낙연은 고인의 곁을 계속 지켰다. 아버지와의 이별을 알지 못하는 어린아이처럼 DJ께서 떠나신다는 것이 실감날 리가 없다고 했다. 그리고 감사를 드려야 한다고 덧붙였다.
나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려야 한다, 김대중 대통령님처럼 위대한 인간을 내 나이 스무 살부터 가까이서 뵐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나는 김 대통령님께 영원히 감사를 드려야 한다, 그분이 계셔서 나는 행복했고, 충실했다. 아직 나는 김 대통령님의 명복을 빌 준비거 되어 있지 않다. 나에게 김 대통령님은 아직도 살아 계신다.
이낙연은 김대중과 아직 대화를 나눈다. 그가 남긴 축사의 한 대목처럼.
“많은 과제에 부딪칠 때마다 만약 김대중 대통령님이 이 자리에 계신다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셨을까 하고 생각하곤 합니다. 김대중 대통령님이 계시지 않는 현실이 갈수록 안타깝습니다.”
‘거목의 지도자’로부터 배운 이낙연은 자기 안에 또 하나의 나무가 큼직하게 자라고 있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을 것이다. 김대중의 삶, 그 역경은 아낙연의 인생에 뜨거운 감사로 존재하고 있다.
글 이제이 <다름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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