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숭아꽃 물들이는 여심
장생주 / 수필작가
밤이 이슥한데 아내는 소녀 마냥 설레는 모습으로 손톱에 봉숭아 꽃 물을 들이고 있다. 낮엔 아이들 때문에 엄두도 못 내다가 하루의 일과도 끝나고, 아이들도 잠든 이 시각에 조용히 여심을 닦고 있나 보다.
내 집 뜰엔 봉숭아도 없는데 낯선 이 마을 뉘 집에서 얻어다 놓았는지 신통하기도 하다.
아내의 손톱에 봉숭아 이파리를 짓찧어 백반을 섞어 발라 주고 골무를 끼워 묶어 주었다. 그 곱던 손결이 아이들 뒷바라지에 꽤나 거칠어졌다.
마음은 항상 나이 어린 소녀만 같고 얼굴 또한 봉숭아처럼 수더분한데, 손가락 마디마디 마다 그 동안의 고생이 서려 있는 듯싶어 왠지 마음이 안쓰럽다.
봉숭아꽃은 여인의 꽃이다. 꽃 모양이 봉황새와 비슷하다고 해서 봉숭아라고 했다는 이 꽃은 고향 집 장독 옆이나 울밑에서 여름부터 가을까지 있는 듯 없는 듯 오롯이 피던 꽃이다.
또한 봉숭아꽃은 장미처럼 화려하지도 양귀비처럼 요염하지도 않은 그저 소박한 게 시골에 살던 큰누님 같은 꽃이다.
꽃이 지면 방추형의 열매가 열리는데 완숙한 열매에 손을 대면 씨앗이 툭 터져 나온다. 그래서 영국에선 「나를 건드리지 마셔요( touch me Not)」라는 꽃말이 붙었나 보다.
향규(香롬閨)에 일이 없어
백화보(百花譜)를 헤쳐 보니
그 이름을 뉘 라서 지어 낸고·
허 난설의 글이라고 전해지는 이조 선조시대의 봉숭아 노래의 첫 머리이다. 여기에서도 봉숭아는 규방의 여인에 빗대어 읊고 있는 걸 보면 정녕 봉숭아는 수줍은 여인의 꽃이 아닌가 싶다.
봉숭아꽃은 애잔한 꽃이다. 선조들이 즐겨 불렀던 「울밑에선 봉숭아」는 처량한 꽃으로 나타났다. 그 꽃은 햇빛을 보지 못하고 숨죽이고 사는 망국의 한을 몰래몰래 삭이던 서러운 꽃이었다.
한 민족의 슬픔을 봉숭아에 담아 본 시심이나 그 노래를 눈물로 부르다가 고초를 당했던 선열들의 마음이 어찌 서럽지 않았으랴!
그러나 봉숭아는 한 많은 설움을 결코 겉으로 내색하진 않았다.
울분을 안으로만 삭이며 열매를 맺고 꽃씨를 만들었다. 꽃씨는 하나의 소망이었다. 꽃씨를 뿌리는 마음은 기도하는 마음이었다.
비록 볼품없는 자색에다 예쁘지 않은 꽃이지만 봉숭아가 여인들로부터 사랑을 받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나 싶다.
그런데 그토록 사랑을 받던 봉숭아도 차츰 소외되어 가는 듯싶고 손톱에 물들이는 소녀들도 줄어들고 있다.
이따금 초등학교 여학생들의 손톱에서 봉숭아꽃물을 발견하긴 하지만, 점점 사라져 가던 걸 이 한 밤. 내 아내가 손톱에 물들이는 걸 보니 새삼 정겹기도 하다.
봉숭아는 고향을 생각하게 한다. 내 고향 집 이웃 샘가에는 물을 긷는 여인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그 곳에는 웃음도 많고 정담도 많고 뭔가 서로 나누어 먹는 손도 푸짐하였다. 시집 온 새댁의 이바지도, 돌아
가신 시아버지의 고사떡도, 곧잘 건네주던 곳이었다. 그 샘가에선 물을 길으러 간 내 누이랑 그 또래의 소녀들이 손톱에 봉숭아 꽃 물을 들이
곤 하던 게 지금도'눈에 선하다.
생각하면 봉숭아는 한 많은 여인처럼 외롭고 쓸쓸하게 살아 왔다. 때로는 소외당하고 때로는 버림받으며 늘 그늘진 곳에서 사는 꽃 봉숭아 !
그는 비록 외롭지만 수더분한 내자와도 같은 꽃이라서 사랑스럽기 그지없다.
장생주 님 : 월간문학지 등단. 한국문인협회회원. 국제펜클럽회원.
대표에세이문학회 회장 역임. 모란촌문학동인회장 역임.
본지 편집인 겸 편집장. 저서 :수필집「허공을 지나는 한 점 바람」「이 잘 될 놈아」외 수상 : 전남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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