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1) 다산을 찾아서〕
현실주의 문학의 정점, 다산 정약용
산바람 불어와 가랑비 뿌리는데
서로가 가기 싫어 망설이듯 하는구나
주저하고 망설인 듯 무슨 소용 있으리요
이 이별 끝내 없을 수 없는 것을
-『사평촌의 이별』(沙坪別)
다산이 유배지로 떠나기 위해 한강을 건너 사평촌(沙坪村)에서 가족들과 이별하면서 지은 시(詩)이다. 부슬부슬 가랑비 뿌리는 가운데 서로가 헤어지기 싫어 머뭇거리지만 끝내 만날 기약 없는 이별을 해야 하는 괴로움이 짙게 배어 있다.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을 남겨둔 채 다산은 한반도 남단의 구석진 곳(영일만의 장기)으로 떠나야 했으며, 그 후 18년간을 머나먼 타향에서 길고 긴 유배 생활을 하였다.
유배지에서 꽃핀 학문과 예술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지금의 경기도 양주군 능내리에서 태어났다. ‘마재’라고 불리는 그 곳은 한강 상류에 자리한, 풍광이 아름다운 고장이었다. 다산은 15살 되던 해에 벼슬살이를 하는 부친을 따라 서울에 와 살면서 성호 이익의
유고『성호사설』을 읽게 되었는데, 이는 그가 실학사상을 접촉한 중요한 계기였다. 이를 계기로 다산은 학문에 대한 뜻을 굳히게 되었고, 학문의 방향 또한 제자리를 찾을 수 있었다.
여기서 그의 학문이 조선 후기 실학파의 한 계열인 성호학파에 그 연원을 두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22살 되던 해에 진사(進士)가 되어 성균관(成均館)에 있으면서 정조로부터 그의 재능과 학문을 인정받게 된다. 그 후 대과에 합격한 그는 10여 년동안 여러 벼슬을 역임하게 되는데,
이를 통해 그동안 쌓아 온 실학사상을 실현해 볼 기회를 갖게 되었다. 서양의 근대 과학기술을 수용하여 기중기 등을 고안하고 수원성 축조를 설계하거나 종두법을 연구·실험하였다.
한편 그는 집권층의 무능과 민생의 처참한 현실을 목도하면서 당시의 불합리한 모순을 더욱 깊이 인식할 수 있었으며,
『인재책』(人才策),『논농정소』(論農政疏) 등의 글을 지어 잘못된 제도와 관습을 개혁할 것을 주장했다. 이를 통해 그는
‘낡은 조선을 새롭게 하려고’(新我之舊邦)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세도정권이 자리를 잡게 됨에 따라 그동안 탕평책의 일환으로 중용되었던 다산을 비롯한 남인계의 인사들은 정계에서 축출된다. 19세기 벽두를 알리는 신유사옥 때 실학파 계열의 학자와 문인들이 대거 유배를 가게 되었으며, 그 역시
천주교도로 낙인을 받아 그의 생애의 큰 분수령에 해당되는
40세부터 57세까지 길고 긴 유배 생활을 해야 했으며, 그의 셋째형은 사형을 당했고, 둘째형은 유배형을 받았다.
영일만의 장기라는 곳에 머문 다산은 궁벽한 시골의 가난과 굶주린 백성들을 목격하게 된다. 해녀들의 갯바라지를 보고 신가하게 여기고, 농어촌 풍물을 관찰하면서 그 곳의 생활 습속에 익숙해 가던 다산은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다시 체포되어 서울의 감옥으로 압송된다. 천주교 신자였던 황사영이 청나라로 보내려던 편지가 발견되어 옥사가 일어났던 것이다.
그는 이 때 “천 명을 죽이더라도 정약용 한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아무도 죽이지 않는 것과 같다”고 할 정도로 죽기 일보 직전까지 몰리었다. 무혐의로 풀려난 다산은 강진으로, 그의 둘째 형 정약전은 흑산도로 각각 유배지가 바뀌어, 오랏줄에 묶인 두 형제가 함께 멀고 먼 유배길에 올라야 했다.
진실과 정의는 결코 가릴 수 없는 것
모진 고문으로 몸이 상하고 절망의 나락으로 빠진 운명이었지만, 다산은 그러한 절망의 늪에서 벗어나 ‘다산학’(茶山學)을 완성하였다.
강진읍에 도착한 다산은 실의와 울분을 달래면서 본격적인 학문 연구와 저술 활동에 전념하는 한편,『하일대주』(夏日對
酒),『애절양』(哀絶陽) 등 당대의 현실을 날카롭게 형상화한 시(詩) 작품을 다수 창작하였다.
오랜 유배 생활 속에서 그는 민(民)의 생활에 밀착하면서 당대 사회의 첨예한 모순과 각종 폐단을 더욱 심각하게 인식할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그는 유가의 기본 경전인 사서삼경을 재해석하는 일에 착수하여 주자학의 관념적 해석 틀에서 벗어나 시대를 변혁시킬 논리와 근거를 찾는 일에 몰두하였다.『경세유표』(經世遺表),『목민심서』(牧民心書) 등 유명한저술을 집필하고 경서에 대한 방대한 고증 작업을 진행하였다. 다산 자신의 기록에 의하면 그의 저서는 경서를 풀이하고
해석한 것이 232권이고 문집이 260여 권에 이르는데, 그 대부분이 유배 기간에 이루어졌다. 고난과 좌절 속에서 굽히지 않을 때 학문과 예술은 꽃피울 수 있다는 역사적 교훈을 새삼 일깨우게 한다.
진실과 정의는 결코 가릴 수 없는 것! 다산은 18년의 유배 생활을 마치고 만년의 여생을 고향집에서 보낼 수 있었다.
아내와 자식들 곁으로 다시 돌아온 그는 그동안 저술한 방대한 분량의 서적들을 마무리하였는데,『흠흠신서』(欽欽新書),
『아언각비』(雅言覺非) 등은 바로 이 때 비로소 완성을 보았다. 1836년 75세를 일기로 다산은 생을 마쳤다.
송승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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