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기자단의 엠바고 유감
----------------- 김현철 (언론인)
필자가 서울에서 기자 생활을 할 때 가장 괴로웠던 일은 당시의 군사 정권이 싫어 할 기사를 단독 취재해서 데스크(편집장) 앞에 내 놓으면 그 기사가 보도되어도 괜찮은지의 여부를 편집국장(방송은 보도국장)과 협의한 후 "보도불가" 결정이 나는 경우였다. 이럴 때면 "국민의 알권리를 위해서 죽도록 취재했는데 이렇게 당하고도 기자생활을 계속해야 돼?"하고 반문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 후 4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나라의 모든 분야가 발전하고 있는데 국민의 자유와 특히 정치와 관련된 언론의 자유는 꾸준히 발전하던 도중 불과 몇 년 사이에 급격히 위축되고 있음을 실감한다.
최근 뜻 있는 언론인들로부터 우려의 눈총을 받고 있는 청와대 출입기자들의 '자발적 엠바고' 문제를 살펴보자.
5.16 쿠데타(지금도 "5.16 혁명"이라고 말하는 분들이 많음은 안타까운 일이다) 이후, 그 혹독한 군정 하에서도 정권 차원에서 그 기사는 보도해서는 안 된다는 지시가 있거나 분명 그러한 지시가 내려 올 가능성이 있는 기사를 언론사 스스로가 보도하지 못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기자 스스로가 꼭 나가야 할 기사를 자발적으로 자제하는 일이란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엠바고'란 일정 시점까지의 보도금지를 뜻하는 언론인용 용어다. 또는 취재대상이 기자들을 상대로 보도 자제를 요청하거나 기자실에서 기자들 간의 합의에 따라 일정 시점까지 보도를 자제하는 행위를 말한다.
이 엠바고 중에는 1) 미리 취재원으로부터 발표내용 등에 대한 보충취재가 필요할 때 취재원과 취재기자와의 합의에 의해 이루어지는 '보충취재용 엠바고', 2) 사건발생은 분명한데 정확한 시간을 예측하기 어려운 경우, 그 사건이 일어난 이후에 기사화한다는 조건으로 보도자료를 미리 제공받는 '조건부 엠바고', 3) 지금 보도하면 국가,사회,인명에 피해를 끼칠 수 있어 사건이 해결될 때까지는 특정한 정보를 보도하지 않는 '공공이익을 위한 엠바고', 4) 정부가 외교관의 아그레망을 부여할 때까지 보류하거나 양국이 동시에 발표하기로 되어 있는 협정 또는 회담개최에 관한 기사를 공식발표가 있을 때 까지 일시적으로 보도중지 하는 '관례적 엠바고' 등이 있다.
그런데 요즈음 청와대 기자단의 엠바고는 위 네 가지의 관행의 도를 넘어서서 8.8 개각 때 총리 및 장관 후보자가 어떤 경력을 지닌 인물들이며 또 앞으로 직무를 수행하기에 지금까지 도덕적인 하자는 없었는지의 인사검증을 철저히 수행해야 할 임무는 망각하고 기사 담합을 통해 출입기자단 임의로 보도 관제를 실시함으로써 국민의 알권리를 박탈하고 말았다.
알 권리를 짓밟힌 국민들은 평소에 믿었던 언론을 더 이상 기대하지 않으며 야당 국회의원들의 청문회 자료를 통해서 비로소 후보자들의 과거 경력을 알게 되었으니 이 나라의 앞날이 암담할 뿐이다.
대부분의 청문회 자료를 자유 언론을 통해 입수했던 국회의원들도 이제는 후보자들에 관한 모든 자료를 직접 관련 기관을 통해 취재할 수 밖에 없는 기묘한 세상이 된 것이다.
더구나 청와대 기자단의 엠바고는 8.8 개각 때 뿐 아니라 '지난 6월 말 한미 정상회담과 전시작전통제권 전환 연기', '지난해 말에야 엠바고가 풀린 원자력 발전사업 수주', '지난 달 불거진 리비아와의 외교 마찰' 등 반복적으로 행해지고 있다는 데 그 심각성이 있는 것이다.
정권에 유리하건 불리하건 국민들이 알아야 할 문제는 '언론인의 긍지'를 생각해서라도 정권의 언론 통제 노력에 끝내 맞서야 하거늘 오히려 결탁의 길을 택한다면 그러고도 '국민의 알권리' 운운하며 스스로를 '언론인'으로 자처할 수 있겠는가?
현 정권 이후 언제 부터인지 기사 취재가 철저히 봉쇄되고 발표문에만 의존해야 하는 청와대 출입 기자들의 처지를 이해하면서도 출입기자단을 운영하는 이유가 국민의 알권리 때문이라는 점을 기억한다면 기자들이 한국 최대 권부인 청와대를 홍보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감시하러 간다는 사실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감시 기능이 없는 언론은 이미 언론이 아니다.
미국 백악관 출입기자들이 각자 백악관 내 중요 부서를 찾아서 취재 경쟁을 벌인 끝에 1면 머리 기사들을 속속 물고 나오는, '국민의 알 권리' 충족 차원의 취재 경쟁이 우리의 청와대에서 이뤄질 날은 언제나 올까? 그 때 비로소 우리 언론은 올바른 자유를 향유하게 될 것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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