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승환 칼럼
원로와 전문가
2002년 여름 국방일보 기자로 활동했을 때, 독도와 울릉도, 백두산에 오른 적이 있다. 독도와 울릉도를 거쳐 백두산으로 가는 동안, 해환(海煥) 윤동주(尹東柱)시인을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의 활동무대를 둘러보왔다. 그 방문단을 이끄신 분이 상지대 총장을 지낸 고려대학교 사학과 강만길 교수님이셨다.
강 교수님은 등산복 차림으로, 자그마한 배낭을 메고 계셨다. 의관(衣冠)이 단정하셨고, 기품이 있으셨다. 한국사(韓國史)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막힘이 없으셨다. 쉬는 시간이면 사람들은 한말씀이라도 더 듣기 위해 강 교수님 근처에 모여들곤 했다.
이미 한국사에 일가(一家)를 이룬 선생이셨지만, 매년 발표되는 박사학위 논문을 빼놓지 않고 읽는다고 하셨다. 그렇지 않으면 금세 뒤처진다고 말씀하셨다. 필자는 그 분에게서 진정한 원로(元老)의 모습을 보았다. 안개가 덮이면 한치 앞을 볼 수 없다가도 한순간 바람에 신령스런 모습을 드러내곤 했던 백두산 천지에서, 강 선생과 함께 찍은 사진을 오래도록 집 거실에 걸어두었다.
지난해 5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A정당에서 공천자 명단을 발표했다. 그런데 명단을 보니 의아했다.
부당하게 노동자를 해고하고 노조를 탄압한 사주, 편법으로 공사를 수주해 논란을 빚은 정당인, 시민단체가 반대한 경제단체장. 소위 공천을 받은 사람들에게 ‘존경(尊敬)’의 의미를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저 ‘오직 돈과 권력을 아 세속에서 출세한 사람들’이라고나 할까.
국제정치를 전공한 선배 교수를 찾아 인터뷰를 요청한 적이 있었다. 그는 “젊은 교수가 나서면 선배들이 싫어한다”며 인터뷰를 정중히 거절했다. 그러면서 TV토론에 자주 나오는 선배 교수를 추천했다. 그는 전공이 달랐다. 더 놀라운 일은 그 뒤에 일어났다.
그 선배 교수가 “인터뷰를 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선배 교수가 자기 전공이 아니라고 거절하면, 자연스럽게 다시 젊은 교수에게 돌아가고자 했던 필자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자기 전공이 아니면 아는 체하지 않는 것이 학계의 금도(襟度)일 텐데, 문제는 다른 사람의 영역을 기웃거리는 사이에 자기 전공마저 부실해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앞섰다.
지난해 한 자치단체가 부실공사 처벌에 대한 법 해석을 의뢰했을 때, 변호사 세 명이 서로 다른 견해를 내놓았다. 그 자치단체는 변호사 세 명 가운데 두 명이 내놓은 의견을 택해 결론을 내렸다. 법률 해석을 무슨 인기투표쯤으로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상황이 이쯤 되면 변호사들은 자기 주장의 근거를 밝히고, 누구의 주장이 옳은지 결론을 내야 했다. 전문가(專門家)라면 그 정도의 소신과 자존심은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걸로 끝이었다. 심지어 아무 설명 없이 그냥 결론만 내놓은 변호사도 있었다.
경제일간지 기자로 활동했을 때 여러 번 법률자문을 받았지만, 필자는 자기 판단의 법리적 근거를 밝히지 않은 법률자문서를 일찍이 본 적이 없다. 그렇다면 혹시 변호사가 자기 판단의 근거를 밝히지 못하는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닐까.
세속에서 출세한 것에 불과한 정치인들과 마지막까지 고도의 전문성을 견지해야 할 전문가들이 그저 자기 상식에 근거한 무책임한 얘기만늘어놓는 한, 지역사회는 지식사회 속으로 한발짝도 나아가지 못한다.
국민의 대표를 자처하는 정치인은 책임질 때 책임질 줄 알아야 하고, 원로와 전문가는 사회적 책임을 다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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