짝꿍 외교와 매몰 정치
윤기향(강진출신 미국 플로리다 어틀랜틱 대학교 경제학 교수)
꿈 많은 여고 시절 여학생들이 누리는 특권 중의 하나는 짝꿍 친구를 갖는 것이다. 사전에서는 짝꿍을 “단짝인 짝을 재미스럽게 일컫는 말”로 풀이하고 있다. 여학생들은 이러한 짝꿍에 대한 끈끈한 정 때문에 세 명 또는 그 이상이 함께 친구가 되어 친하게 지내는 경우가 흔치 않다. 처음에는 셋이 가까이 지내다가 두 명이 짝꿍이 되어 친하게 지내면 나머지 한 명은 의도적으로 따돌림을 당하는 것이 짝꿍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지난 10월 초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APEC) 정상회의가 열렸다. 그 회담에 연이어 동남아시아국가연합 (ASEAN)+3의 정상회의가 브루나이에서 개최되었다. APEC 정상회의에는 한국의 박근혜 대통령, 일본의 아베 총리, 그리고 중국의 시진핑 주석이 참석했고 ASEAN 플러스3 정상회의에서도 이들 세 나라의 정상들이 조우했다. 이들 두 개의 굵직한 국제회의에서 우리의 주목을 끈 것은 그 내용보다도 이들 세 나라 정상들의 만나는 모습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시진핑 주석을 만났을 때에는 마치 10년 지기라도 만난 것처럼 환한 표정을 지으며 다정하게 웃는 모습으로 그를 맞이했다. 그러나 아베 총리가 바로 옆 자리에 앉은 경우도 있었는데 화난 표정을 연상케 하는 모습으로 눈길조차도 줄려고 하지 않는 장면이 눈길을 끌었다. 아베 총리가 말을 걸려고 하는 데에도 별로 반응을 보이지 않은 것이다. 언론에서는 아베 총리가 먼저 인사를 건네자 박 대통령이 마지못해 그에 대해서 반응했다는 뉘앙스로 그 당시의 분위기를 전했다. 시진핑 주석과의 관계에서는 마치 짝꿍을 만난 것처럼 기쁨을 감추지 못한 반면 아베 총리와의 관계에서는 따돌림을 당한 친구를 대하는 것처럼 그와 거리를 두려는 모습이 역연히 나타났다.
박 대통령은 그동안 일본에 대한 반감을 지속적으로 피력해 왔다. 한일관계는 박 대통령 취임 이후 독도와 일본군 위안부들에 대한 사과와 보상 문제 등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역사 인식 문제로 인해 얼어붙어 있다. 그녀는 최근 유럽 순방 중 북한의 김정은 국방위제1비서와 정상회담을 할 용의가 있음을 밝힌 적이 있다. 이에 반해 박 대통령은 영국 BBC방송과의 인터뷰에서 "일본은 과거사 문제와 관련된 종전의 입장을 바꾸지 않고 있다. 만일 일본이 같은 역사적 해석을 고집하고 되풀이 한다면 정상회담은 안하는 것이 낫다”고 말한 바 있다. 그러나 박 대통령이 일본을 따돌리고 있을 때 일본은 집단자위권 행사에 관한 협력을 미국으로부터 이끌어 냈으며 영국과 호주도 이를 지지했다. 또한 세계적으로 영향력 있는 신문인 윌 스트리트 저널은 “센카쿠 (중국명 다오위다오)는 일본의 영토”라는 사설을 통해 일본에 날개를 달아주었다. 그런 가운데 일본 정부는 북한 납치자 문제를 몽골과 협의하기 시작했으며, 아베 총리는 몽골 측에 “납치 문제 해결을 위해 직접 북한을 방문할 의사가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엘베그도르지 몽골 대통령은 10월 말 북한을 방문하고 아베의 뜻을 전달한 것으로 보인다.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말이 있지만 박 대통령은 그녀의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정치적 스펙트럼과는 완전히 대칭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박 전 대통령은 이영희 교수가 1970년대에 중공문제를 다룬 책 “8억 인구와의 대화”라는 책을 출간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를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해서 옥고를 치르게 한 반면 일본과의 관계에서는 국민들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청구권 협정을 서둘러 체결하기 위해 한일 국교정상화를 무리하게 밀어붙였다, 그 결과가 “1965년 한일협정을 통해 위안부 문제를 포함한 모든 식민지시절에 대한 보상은 끝났다”고 일본이 주장하는 빌미가 되었다.
박 대통령이 그동안 보여 온 정치 철학과 행태를 보면 그녀는 여성 대통령으로서의 장점을 살리기 보다는 여성 대통령으로서의 한계를 보여주었다고 보는 편이 올바른 평가일 것이다. 여성 대통령이 선출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은 남성 대통령의 약점인 수직적인 정치, 즉 고집과 독선, 대결과 군림이 판을 치는 기존의 정치로부터 코페르니쿠스적 변화가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 많은 사람들은 그녀에게서 고집보다는 융통, 독선보다는 타협, 대결보다는 대화, 군림보다는 소통을 발휘하는 수평적인 정치를 기대했다. 그러나 그녀는 이러한 장점을 보여주지 못하고 남성 대통령이 갖는 단점을 모두 갖추면서 여성 대통령으로서의 약점까지 추가했다. 섬세한 감성의 정치가 아니라 본인이 싫어하는 사람들과는 외면하는 감정의 정치를 보여 주었다. 한일관계를 고등학생 짝꿍의 관계처럼 미성숙한 것으로 혼동하지나 않는지 걱정이 된다.
경제학에서 매몰비용 (埋沒費用)이라는 개념이 있다. 이는 과거에 이미 지불된 비용을 말한다. 그 반면 기회비용 (機會費用)은 어떤 의사결정을 할 때 앞으로 입게 될 비용을 의미한다. 우리가 어떤 의사결정 (선택)을 할 때 다른 가치 있는 대안들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포기해야 할 여러 가지 가능한 대안 중 최선의 대안의 가치가 바로 기회비용이다. 합리적 의사결정권자는 매몰비용이 아니라 기회비용을 따진다. 매몰비용은 과거에 이미 지출된 비용이기 때문에 현재의 의사결정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현재의 의사결정으로 그 비용을 회복할 수도 없다. 서양 속담에 “지나간 것은 지나간 것이다” (Bygones are bygones.)라는 말이 있다. 셰익스피어의 맥베스가 충고하였듯이 “교정될 수 없는 모든 것은 고려하지 말아야 한다. 이미 행해진 것은 행해진 것이다.” (What's done is done.)
일본과의 과거사 문제를 잊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국제 정치 관계에서 비용과 혜택을 면밀히 따져보자는 것이다. 과거사 문제에 감정적으로 매몰되어서 다른 대안을 외면할 때 우리는 앞으로 더 큰 비용 (기회비용)을 부담할 수 있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접근방법은 매몰비용에 입각한 정치 (매몰 정치)이며 그것은 합리적 의사결정권자가 취할 태도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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