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와 모래
김현임(수필가·모란촌문학동인회 사무국장)
도무지 무엇에도 집중할 수가 없다. 공연히 서성대는 가하면 지붕 위 쌓인 눈이 흘러내리는 소리라던가 마루 밑 작은 소리에도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는다. 이 모두 정서불안의 전형적 증세려니 가까스로 집어 든 책이라고 온전히 읽어 질 리 없다. 눈과 머리가 따로 논다. ‘삽질한다는 표현이 있다. 이는 삽으로 땅을 판다라는 뜻으로만 쓰이지 않는다. 어리석은 짓을 한다거나 단순한 일을 거듭한다는 등의 뜻을 전하는 표현으로 더 자주 쓰인다.’는 환경도서에서 발견해 낸 ‘삽질’, 연일 언론매체에 등장하는 산 짐승들을 파묻는 포클레인 삽날을 떠올리는 섬뜩함에서 달아나 보고자 빼든 이백시선(李白詩選) 아니었던가, 하필 펼친 페이지 첫 시구가 ‘진나라 사슴이 들판으로 달아나니/이를 잡자고 세상은 쑥대밭’이라니! 이바네스라는 낯 선 작가가 쓴 ‘피와 모래’를 책꽂이에서 뽑아낸 것도 전적으로 제목 탓이었는데 놀라워라, 하필 소와 인간이 뒤엉켜 벌이는 사투, 투우를 소재로 한 소설이다.
우리가 견딜 수 있는 고통의 한계점을 시험이라도 하는 걸까. 구제역과 한파와 AI, 한반도 전역에 몰아닥친 삼중고로 도통 정신을 차릴 수 없다. 구제역(口蹄疫), 가축의 입과 발굽에 물집이 잡히는 바이러스성 전염병으로 치사율이 5-55%에 이르며 소, 돼지, 양, 사슴처럼 발굽이 두 개로 갈라진 동물, 즉, 우제류(偶蹄類)에서 발생하는 질병이 온 나라에 퍼져 최악상황에 이르렀건만 뾰족한 대비책이 없다는 작금.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환경파괴의 결과물이라는 한파는 갈수록 기록갱신, 삼한사온(三寒四溫)의 유서 깊은 기온 사이클조차 무너진 지 오래다. 설상가상 조류독감까지 가세했다.
소, 돼지가 생매장된 건 100만을 넘어선지 오래다. 이러다간 씨가 마를 정도라는 우려요, 후 폭풍인 조류인플루엔자로 언 땅에 파묻힌 오리, 닭은 그 배가 넘는 숫자란다. 이 모두가 집단 사육 위주인 공장축산이 빚은 폐해라는 지적이다. 좁은 쇠창살에 가두어 두고 유전자 조작된 배합사료를 먹여 살찌우고 항생제 남용으로 약물 중독된 축사에서 풀려나오는 순간 바로 도살장행이다. 잔인한 처사의 인간에 대한 복수극인가. 주변의 다정하고 친근한 것들만 그렸다는 화백, 최근 새로 발굴되었다는 장욱진선생의 작품 속 소마저 눈을 흘기는 착시에 빠진다.
소가 가진 말은 그의 큰 눈에 다 들어 있다했다. 하여 소의 눈은 순하고 둥그런 감옥이라더니 눈을 감아도 소, 소, 소다. 매미는 어머니가 오래 전 기르던 소의 이름이다. 걸핏하면 매미와 당신의 눈을 맞부비시던 어머니, 그래선가. 해거름 낮게 퍼지던 ‘음머’가 내 귀엔 ‘엄마’로 들렸다. 끔뻑 끔뻑 고개 끄덕이며 어머니가 부를 때마다 대답하던 신기함, 어머니 방 옆에 바짝 붙은 외양간에서는 여물 쑤는 아궁이가 달려있어 구수한 볏짚 내음과 함께 모락모락 김이 피어올랐다. 반질반질 윤이 나던 매미의 털, 여름이면 모기 퇴치용 쑥불이, 겨울이면 두툼한 방한복을 입고 있던 매미, 이렇듯 소에 대한 어머니의 정성은 끔찍했다. 행여 입맛이 떨어지면 산낙지를 사다 먹이는가하면 시름시름 힘들어하면 아버지가 아끼시는 사주를 컵 째 먹이기도 했다. 목숨 가진 것들에 대한 예의랄까. 고맙고, 정겹고, 송구한 존재로 살아 있는 동안 아낌없는 정성과 대접을 받던 소. 늑대의 공격으로 목울대를 물려 피투성이가 되어 한 방에서 밤을 새웠다던 어미돼지라던가, 당당히 제 집을 지킬 만큼 의젓하던 햇수 오래된 닭의 위용담은 전설처럼 구수했다. 반려, 그것이 예전 우리 어머니 세대가 기르던 가축의 지위였다. 축생이라는 이름으로 절대로 함부로 대하지 않던.
새, 인간에겐 없는 날개를 달고 또 하나의 세상을 보는 새, 가엾은 인간의 착각과 오만을 가만히 내려다보는 새, 쓸쓸함에 빠진 우리에게 이만한 이웃이 또 어디 있는가, 그 새들의 겨우살이를 보면 선하고 아름다운 목숨들이란 얼마나 겸허하고 얼마나 꿋꿋하게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지 알 수 있다했다. 새가 우는 저녁이면 무엇 하나 더 이상 필요치 않게 그저 평화로워지는.
신이 우리 인간에게 장엄한 성찰 능력과 비판능력을 준 건 이를 통해 세계의 전반적인 몰락을 제어하고 더 나은 세계를 모색하라는 것, 그것이 우리의 행위의 순금 부분이라는데 오늘의 날씨는, 우리의 삶은 왜 갈수록 이토록 평온하지 못할까. 자연과 인간의 불화, 굳이 귀 기울이지 않아도 감지되는 도저한 불협화음이다. 공중에 폭발하면서 수 천 개의 강철제 화살촉을 흩뿌려 살상 반경 내의 목표물을 초토화한다는 화살촉탄이, 이매망량(魑魅魍魎)이라던가. 실체는 보이지 않으면서 신출귀몰 출현해 사람을 해친다는 허깨비가 이보다 무서울까. 세상이 끝나는 소리는 ‘꽝’하는 굉음이 아니라 흐느끼는 소리라 했다. 세상은 우리의 일부이며 우리는 세상의 일부다. 모든 공적인 사건들은 우리와 뗄래야 뗄 수 없이 연관되어 있으니 사적이든 공적이든 우리는 공범자들이다. 그들을 산 채로 묻은 곳에서 피비린내 섞인 황량한 모래바람이 불어온다. 우리를 가득 채운 머리 숫자에 감탄하던 인간의 탐욕, 그 방관이 부른 대재앙을 잠재울 비책은 과연 무엇일까. 앞서거니 뒤서거니 따라오던 작은 나비 두 마리 팔랑거리는 따사로운 봄날이 우리에게 오기는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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