雙璧堂(쌍벽당)
김현임(수필가.모란촌문학동인회사무국장)
素心違末路 白屋占淸區 (소심위말로 자옥점청구)
野入遙天大 川從斷岸紆 (야입요천대 천종단안우)
松篁含晩翠 煙雨展新圖 (송황함만취 연우전신도)
春到梅花塢 佳期莫遣孤 (춘도매화오 가기막견고)
본디 마음 말로라 어기어지니 조촐한 곳 가려서 집을 삼았소
들은 먼 하늘로 들어가고 냇물은 뚝 따라 얽혔어라
송죽은 늦도록 푸른 빛 띠고 안개비는 그림 새로 펼치는구나
봄은 하마 매화 언덕에 이르렀거늘 좋은 기약 헛되이 보내질 마오.
‘쌍벽당 제봉의 시에 차운하여’라는 원제의 시다. 때마침 절기가 우수 무렵이라선가. 안개비가 그려내는 새 그림이, 이윽고 매화 언덕에 다다랐다는 백호 선생의 시 속 봄기운이 피부에 와 닿는다. 어느 해보다도 혹독했던 지난겨울이었다. 그를 견디어 낸 우리에게 다가 온 바야흐로 가기(佳期), 이 아름다운 때를 어찌 부질없이 놓칠까. 우항 정대유, 근원 김용준, 표암 강세황, 몽인 정학교.... . 매화그림 대가들의 작품 전시회가 열린다는 소식이다. 그림 감상 뿐 아니라 곁들여 옛 어른들이 매화 그늘에서 술 한 잔 마셨다는 매화음(梅花飮)의 풍류를 맛 볼 수 있도록 전시장 한쪽에서 와인을 시음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니, 세상에서 가장 빼어난 정경은 취한 눈 감고 제 마음 속에 펼치는 풍경이라 했던가. 세월 뛰어넘어 전해지는 매향과 향기로운 와인이 더하는 취기는 상상만으로도 봄 아지랑이 닮은 현기증이 인다.
남명 소식의 남명매(南冥梅)도 그렇고, 일찍이 강회백이 공부 후 정당벼슬에 이르러 세인들이 그 곳의 매화를 일러 ‘정당매(政堂梅)라 칭하니 강희맹이 조부의 매화를 찾아 뿌리를 북돋워 선조의 자취를 기렸으니 자손 뿐 아니라 매화의 자손도 더불어 창대해진다고 했다던 경남 산청군 단속사의 정당매를 비롯해 남사 마을의 원정매(元正梅)... 등등. 앞 다투어 전하는 곳곳의 매화 탐방기에 경도되어 아직 기척 없는 내 집 앞 영모정 자락의 매화를 살피다 결국 매화 구절 들어간 글을 찾아 헤매는 격이다.
매화그림(梅畵) 뿐 아니라 빼어난 수필가였던 근원 선생의 수필 대목엔 ‘우리 집 매화가 구름처럼 피었으니... ’라며 벗을 초청하는 구절이 있었고, ‘매화 성긴 그림자 해맑은 물에 비끼어 그윽한 향기 달빛에 더 흔들리누나’는 백호 선생이 매화 시의 제 일인 자로 추천한 임포의 매화시 한 구절이지만 매화를 소재로 쓴 글 중의 백미는 바로 당신이시라는 걸 임제 선생은 아시는지. 저 새와 곤충은 천지의 문장이니 사람이 자신의 문장을 장식하고자 한다면 이런 천지에 있는 문장을 빌려 쓰지 않을 수 없다했다. ‘도국의 열왕은 성은 매씨요, 자는 선춘, 이름은 화다.’로 시작되는 백호 선생의 화사(花史)를 읽는 동안 내 입은 다물어지지 않았다. 봄의 왕국인 도국, 고대 중국의 한 나라였던 도당씨(陶唐氏)를 빌어 질그릇(陶) 나라 속 왕위 쟁탈전을 흥미진진하게 펼친다. 절기마다 피어나는 꽃들을 빗대어 역사 속 등장했다 사라지는 인걸들의 덧없음을 패러디한 백호선생 특유의 재기발랄한 필치는 찬탄을 터트리게 한다. 왕의 자가 선춘(先春)이니 매화야말로 맨 먼저 봄을 맞이하는 꽃이라는 뜻 아닌가. 초나라 대부인 굴원에게 배척을 당했다는 대목에선 고소(苦笑)를 머금지 않을 수 없다. 굴원의 이소에는 수많은 꽃들이 나오지만 오직 매화만이 빠졌다는 걸 포착한 백호선생의 절구(絶句)다.
설신(雪神), 등륙(滕六)의 횡포에 인품이 맑고 마음을 비워 욕심이 적어서 재상으로 등용되었던 고죽군(孤竹君) 오균(烏筠)이 과감히 나섰다던가. 매서운 기세의 겨울바람을 포학을 일삼는 악한 군주로, 검은 대나무, 즉 오죽(烏竹)을 천하의 충신으로 묘사해 놓은 것이다. 계절의 바뀜, 즉 공을 이룬 후엔 떠나야한다는 자명한 수순에 따라 선정을 베풀다가 매화 왕족들이 죽음을 맞는 곳은 춘초궁(春初宮). 절개 굳은 오균도 죽장망혜(竹杖芒鞋)에 의지해 정처 없이 길을 떠나는 것으로 연호가 가평(嘉平)이었던 매화나라는 중화(中和), 즉 버드나무에게 대권을 넘기며 가멸 없이 사라진다. 그런가하면 체격이 여위고 정신이 맑아보이는 매생(梅生)과 물가에서 거주하며 키가 훨씬 크고 지체가 유약해 보이는 유군(柳君), 매화와 버들과의 동황알현(東皇謁見)길, 이른 바 봄맞이 행차의 선두를 두고 설왕설래 다투는 유흥매쟁춘(柳興梅爭春)이란 작품 역시 매화에 쏟는 백호 선생의 남다른 애착이 엿보인다.
후르르 떨어진 매화 꽃잎이 하필 공주의 이마 위에 붙었다. 매화꽃잎 화장의 시초란다. 그 모습에 반한 백봉거(白鳳車:흰나비)가 그녀와 사랑에 빠져 마침내 혼인을 했다니. 이렇듯 의인화 대상은 산천초목은 물론 물상의 유무를 초월한다. 매화에서 버들로 버들에서 모란으로 꽃으로 지칭되는 왕조가 바뀔 때마다 따끔한 어조인 사신의 논평이 곁들여진다. 우화소설이자 액자소설 형태다. 그런가하면 작품 말미엔 총론이라는 결론의 말도 친절히 덧붙여 매듭지었으니 이는 백호 선생, 당신의 역사관일 터.
‘하늘은 사계절을 펼치고 사람은 꽃으로 사계절을 분간하니 사람이 어찌 꽃처럼 믿음이 있다 하겠는가. 꽃은 번화해도 그 번화를 봄바람에 감사드리지 아니하며, 떨어져도 그 떨어짐을 가을바람에 원망하지 않으니 사람이 어찌 그처럼 어질 수 있으랴. 꽃은 섬돌 위에도 피어나고 혹 똥간에서도 자라나매 귀천을 다투지 아니하며 영고성쇠를 함께 하고 있다. 이로 보면 그 공평한 마음 또한 사람과 다르다. 꽃의 세계는 지극히 어질고 지극히 미덥고 지극히 공평하며 수다하고도 수명을 길게 누리니 천성(天性)의 바름을 얻은 것이라 하겠다. 저 언어 문장에 구구하게 매달리고 공리(功利)와 사무(事務)의 사이에서 급급하게 쫓는 자들이여, 어찌 그 품성을 보전하여 바른 데로 돌아올 수 있으리요.’
백호 선생께서 절친한 벗 제봉 고경명 선생께 보낸 시 구절 속 매화의 깊은 뜻을, 이런 화사의 결구로 미루어 짐작하며 남루한 해석은 삼가련다. 달팽이집에 살며 좀벌레가 나오는 책이나 훑으며 지내는 보잘 것 없는 삶, 그래도 목침, 명아주지팡이, 죽부인, 퉁소와 비파, 그들과 함께 이 세상에서 선비가 취할 수 있는 정결한 기물 여든 가지 중 늙은 매화 한 그루도 당당히 끼어 있었다. 단 매화는 바깥채에 은밀히 숨겨 심으라 권했던가. 봄 언덕 도처의 매화나무 가지 끝에 편편히 매화꽃이 하얗게 맺히면 천하가 온통 매향 분분한 봄, 그 속 살짝 붉음의 비밀을 시인만이 알아차리나니 꽃술 피어나기 전에 삼키면 신선이 되고 열매 맺어 바라만 보아도 세상의 갈증을 잊는다는 매화, 그 꽃 만발한 봄에 곰곰 되새김직한 시다.
다음기사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