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이름들
김현임(수필가, 모란촌문학동인회 사무국장)
머리맡에 책을 쌓아두고.... , 한 번쯤 이런 서두의 글을 써 보고 싶었다. 더 바란다면 그런 서두로 짐짓 책에 지쳤다는 듯 엄살 섞인 억양의 즐거운 편지를 쓸 수 있다면... . 마침내 바람이 이루어진 셈이다. 인근 읍의 생태와 역사를 망라한 기록물이다. 요 며칠 하루의 대부분을 그 두툼한 책들과 씨름하며 지냈다. 서로 적이 되어 겨룸을 이르는 단어를 내 좋아하는 책을 상대로 쓸 수 있나싶긴 하지만.
우리와 함께 살고 있었지만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아름다운 이름들, 그들을 만나는 재미가 쏠쏠하다. ‘꺽지, 줄납자루, 갈겨니, 드렁허리, 버들붕어, 각시붕어.... ’ 이 대목에선 어라, 밀어가 서식하고 있었다니! 하는 탄성과 함께 돌 틈에 몸을 숨긴 어류의 지느러미가 살짝 스친다. ‘달뿌리풀, 물억새, 방동사니, 쇠별꽃, 소리쟁이, 여우콩, 족제비싸리....’ 이런 풀이름들을 만나는 페이지도 그냥 넘길 리야. 알알이 검은 구슬 머금던 맥문동이 백합과였구나! 그동안 제 태생의 근본도 몰라주고 흔하다는 이유로 함부로 대했던 초목에 대한 반성도 곁들인다. ‘산개구리, 금개구리, 무자치, 누룩뱀, 표범장지뱀, 유혈목이....’ 여기선 아직도 선명히 감지되는 오싹한 한기, 어느 해던가. 이른 아침 밭을 매다가 마주친 까치살무사의 아찔한 촉감이다. ‘논병아리, 노랑할미새, 붉은배새매, 꼬마물총새, 숲새, 큰유리새, 물레새....’ 이런 새들의 고운 이름들 중 세상에나! 벙어리뻐꾸기가 있다니, 가슴 가득 전해오는 미물의 한(恨)에 내쉬어지는 한숨이다. 그런가 하면 ‘청설모, 등줄쥐, 흰넓적다리붉은쥐, 대륙밭쥐, 오소리... ’ 작은 몸피의 설치류들 이름에서 해후한 삯, 평생을 홀로 살며 눈에 띄는 것조차 기피해 낭인(浪人) 기질이라 했던가. 그 외롭고 비장한 족속에 한참 숨을 고른다.
때론 폭우로 때론 폭서로 변덕을 부리는 7월 입구 장마기 날씨처럼 혼자 웃고 혼자 분개하게 하는 책. 특히 답답한 건 옛 사람의 행적이다. 남편이 죽었다고 젖먹이 아이를 팽개치고 자결한 여자에게 내린 정려문도, 무엇보다 불과 몇 세기 전 왕과 신하 사이에서 벌어진, 여도죄(餘桃罪)의 흔적도 그렇다.
미자하라는 미소년이 왕의 사랑을, 그야말로 총애(寵愛)를 받고 있던 즈음이다. 어느 늦은 밤 제 어미의 병이 위급하다는 전갈에 무단으로 왕의 수레를 타고 어미의 병문안을 하고 왔다. 허락 없이 왕의 수레를 움직인 자는 발을 자르는 형벌에 처하는 게 당시의 법령이었다.
“효행이 지극하다. 어미를 위해 제 발이 잘릴 형벌도 잊다니!”
왕은 손수 나서서 미자하를 극구 두둔했다. 어느 날 왕과 미자하 커플이 과수원에 갔다. 탐스런 복숭아를 한 입 베어 문 미자하가 그 맛이 너무 좋아 왕에게 건넸다. 왕은 또 감격했다.
“어찌 그대는 사랑의 감정이 이토록 섬세한가. 자신이 먹는 맛도 잊고 내게 먹이다니!”
하지만 사랑은 흐르는 시간과 함께 곤두박질쳐 사라지는 참으로 요망스러운 것, 어느덧 총애가 식은 왕은 소릴 질렀다.
“저 놈은 그 언젠가 나를 속이고 감히 내 수레를 탔는가하면 제 잇자국이 선명한 복숭아를 왕인 내게 먹였다.”
남의 나라 왕뿐 아니다. 명나라 태종이 일개 사신으로 머문 그를 잊지 못하였단다. 결국 화공을 불러 그의 초상화를, 그러니까 몽타주를 그리게 할 정도였다던 명사신(名使臣) 최용소다. 자신의 임무를 이 정도 달성했으니 후한 상을 주었나. 하지만 치하는커녕 귀국 후 왕보다 먼저 중을 만났다는 이유로 장형(杖刑)을 받았다. 노신(老臣)이 틀에 묶여 매를 맞는 장면의 민망함에 나는 내게 맡겨진 교정(矯正)이라는 냉정한 중책을 잊고 만다. 만사 제치고 걸핏하면 거나한 잔치를 벌이는 왕에게 간언했다는 이유로, 피난 중 물의 깊이를 헤아리지 않고 무작정 건너려는 왕의 행차를 잠시 지체하게 했다는 이유로, 왕자와 공주, 그러니까 슬하의 혼례와 저택의 사치를 자제하고 그 비용을 아껴 국난 중 관기 확립에 힘쓸 것을 고했다는 이런 갖가지 죄 아닌 죄를 이유로 좌천과 유배를 당하는 벼슬아치가 한 둘이 아니다. 옥좌에서 ‘나뭇가지가 번성하면 가지가 꺾인다(木實繁者披其枝)’는 따위의 문구를 가슴에 새기기라도 하였다는 듯 어진 신하에게 행패에 가까운 가혹한 처사를 보이는 왕들이 수두룩하다. 오죽하면 늙은 신하가 벼슬길에서 물러나며 걸해골(乞骸骨), 이제 그만 부려먹었으니 제발 제 해골만은 돌려주십시오 간청한다던가. 어쨌든 읍지(邑誌)의 다른 난과는 달리 인물편 책자의 속도는 더디기만 하다. 한문투성이 원문도 그렇지만 군신 간의 이런 행태 덕택이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는 노랫말을 의심케 하는 사례가 작금이라고 없으리요. ‘뗏밭굴재, 바람재, 알랑굴재, 골모릿재, 가재재, 여시재.... ’ 활자가 어른거리는 눈을 감고 가만히 읊조리는 옛 언덕의 아름다운 이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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