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과 할머니
김한얼(강진고등학교 2학년)
‘산바’라는 태풍이 저 남태평양 어디에선가 쏜살같이 달려오나 보다. 지난번 우리 강진에 큰 피해를 주고 간 볼라벤 태풍보다도 더 센 태풍이라고 방송마다 예고되고 있는 토요일 오후 일이다.
토요일이라 점심을 먹은 후 밖으로 나왔다. 엄마 가게도 도와드릴 겸 조용히 독서도 하고, 글도 쓰고 싶은 생각이었다. 사실 가게에서 게임만 한다고 늘 혼나는 게 일쑤지만......
가게까지 걸어가려면 집에서 20분 정도를 걸어야 한다. 강진읍 중앙로를 지나서 동성리 쪽으로 걷고 있을 때 한 할머니가 나를 불렀다.
“학생 나 좀 도와주시오”
주름살이 가득한 할머니의 표정은 무언가 시름이 담겨서인지 무척이나 간절해 보였다. 도움을 요청하려는 마음인지 나를 불러놓고도 안절부절 못하셨다.
“예, 무슨 일이신데요?
대충 대답은 했지만, 할머니의 표정이나 행동에서 그냥 지나치면 안 될 동정심이 솟아났다. 하지만, 그 다음일은 너무 갑작스럽고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할머니는 나를 건물 안으로 따라 들어오라고 했다. 아마도 예전에는 구멍가게나 책가게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건물 지붕을 양철 같은 것으로 막았는데, 낡은 건물에 먼지만 가득했다. 건물 안쪽으로는 지붕이 탁 트여진 작은 공간이 있었는데, 그곳에는 여러 개의 항아리와 장독이 놓여있었다. 할머니가 오래전부터 사용하던 살림살이 같았다. 세로형으로 길기만 한 집이다. 할머니 혼자서 이곳에서 사시나 보다 하는 생각을 하며, 도대체 뭘 도와달라는 것일까만 머릿속에 가득했다.
할머니가 내게 부탁한 일은 지붕의 겉면을 구성하는 두 개의 양철을 내리는 일이었다. 태풍이 또 온다고 하니 그 양철지붕을 내려야 할 것 같아서 나를 불렀다는 것이다. 쌓아놓은 양철을 보니 아마도 지난번 볼라벤 태풍 때 양철 지붕들이 내려온 듯 했다. 할머니는 지금까지 그 양철들이 위험하게 생각되지 않아 방치 했으나, 이번엔 더 센 놈이 온다고 하니 걱정이라면서, 어른들을 불러 두 개의 양철을 제외하고는 모두 치웠다고 했다.
아, 심난했다. 왜 그 어른들은 양철 두 개를 남겨놓아 나를 힘들게 하는가. 순간 너무 귀찮아졌다. 사실, 힘쓰는 일은 내 적성이 아니기에 걱정이 됐다. 하지만, 마음을 고쳐먹었다. 어차피 할머니를 도와주려고 따라 들어왔는데,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양철이 도깨비처럼 무서웠다. 양철의 단면에 살을 베일 것 같은데, 딱딱하고 다루기 힘든 양철을 어떻게 내리란 말인가, 내 힘으로.
할머니의 표정을 보니 만약 내가 못하겠다고 돌아서면 실망이 크실 것 같았다. 그리고 이런 일도 못 도와드린다면 내 자신이 정말 한심하게 느껴질 것 같았다. ‘내가 지금까지 누구에게 어떤 선행을 베풀었던가’ 생각해보니 억지로 한 것 말고는 거의 없었다.
나는 가방을 맨 채로 허름해 보이는 나무사다리를 잡았다. 올라서면 금방이라도 부러져버릴 것 같은 나무사다리에 두려움이 생겼다. ‘만약 다치기라고 하면 어떡하지, 못하겠다고 나와 버릴까, 모르는 사람이니까 괜찮겠지’ 그러다가 다시 ‘여기까지 왔는데, 어딜가 이 짜샤,’ 마음이 천당과 지옥을 왔다갔다 했다. 할머니에게 가방을 건네주고 사다리를 올라타기 시작했다. 삐걱삐걱 소리가 났다.
“할머니 이 사다리 안전하긴 한 거지요?”
나는 몇 번이나 물었다. 할머니의 대답은 한결같이 안전하다는 대답이지만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다.
“할머니, 내려야 하는 게 뭔데요?”
“저기, 그 위에 덮어져 있는 양철, 아마 두 개 일거야”
양철 두 개가 여러 전선들과 미묘하게 놓여있고 지붕 사이 각도에 끼어 있어 어려워보였다.
“할머니, 저 말고 누구 도와줄 사람 없나요?”
사실 의문이었다. 근처에 어른들이 있을 텐데, 지나가는 나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일까.
“학생 말고는 도와줄 사람이 없어. 이미 다른 사람들은 갔고, 자식들은 서울로 떠나 도와줄 수 없고, 지나가던 학생 둘한테 도와달라고 했더니 싫다면서 그냥 가버렸어”
결국 나밖에는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결론이다. 아무튼 먼지가 가득하고 모서리가 날카로운 양철 두 개를 내리기 위해 손 장갑을 꼈다. 생각보다 무거웠다. 지붕이 탁 트인 장독대로 양철을 옮길 수는 없어서, 건물 왼편에 있는 한적한 주차장으로 옮기기로 정했다. 또 한번 나무사다리를 내려갈 때는 가슴이 철렁거리며 제발 나무사다리가 잘 버텨주라고 주문처럼 중얼거렸다. 겨우겨우 붙어 있는 양철들을 떼어 옮길 때 양철소리가 너무 싫었다. 후닥후닥 끝내버리고 싶어 남은 양철로 다가서는데, 날카로운 못이 보였다.
5센치 정도의 철못이 양철에 박혀 있었다. 할머니가 다칠까봐 조심하라고 소리쳤다. 할머니에게 조심하라고 계속 ‘못’ ‘못’ 소리를 하며 천천히 옮겼다. 그때 내 허벅지 살갗에 아픔이 느껴 주춤하자, 할머니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다행히 살짝 긁힌 정도였다. 정말 다행이었다. 조금만 깊숙이 베었더라면 큰 사고가 날 뻔했다.
그때였다.
“학생 뭐하는 거야? 양철을 왜 거기에 내려?”
어떤 아주머니가 다가오더니 눈살을 찌푸리며 나에게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힘들어 죽겠는데 무슨 일인가.
“할머니가 도와 달라 해서 도와주고 있습니다”
“뭐? 모르는 사람인데 그냥 턱하니 도와줬다고?”
짜증도 나고 괜히 부끄러웠다. 아주머니는 양철을 왜 내리는 것인지 이해를 못하는 듯 했다. 할머니가 아주머니와 대화를 나눴다. 아주머니의 말은 이런 것이었다. 어차피 다른 사람들이 와서 도와 줄텐데, 뭐 하러 애꿎은 학생을 시켜서 내리냐는 것이었다. 할머니가 태풍이 또 온다고 해서 그런다고 하자, 아주머니는 지금 태풍이 왔냐는 식의 말이었다. 그러던지 말든지 나는 할머니가 원하는 대로 양철을 힘들게 옮겼다. 그러고 나서 할머니에게 인사를 하고 나오려는데 할머니가 고맙다는 말을 몇 번이나 하면서 나를 잡아 세웠다.
“잠깐 기다려 학생 뭐라도 사먹어.”
보상을 원하고 한 일이 아니기에 나는 몇 번이고 거절을 했지만, 할머니는 안 받으면, 보내주지 않을 기세셨다. 결국 나는 받는 것이 할머니가 편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두 손으로 공손히 돈을 받았다. 그러면서 궁금했던 것을 할머니에게 물었다.
“여기가 원래 가게였나요?”
오래된 책들이 꽂혀 있는 것이 참 궁금했다.
“예전에 우리 남편이 했던 한약방이야. 지금은 돌아가시고 없지만”
그 말을 듣자 돌아가신 우리 할아버지가 생각났다. 할아버지는 한약방을 오래 하셨고, 침을 잘 놓아 서울에 사는 국회의원들도 찾아왔다고 들었다. 또 돈이 없어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무료로 진료를 해주어 칭찬을 받으셨던 분이셨다고 했다. 갑자기 마치 우리 할아버지 한약방을 고쳐드린 느낌이 들면서, 가슴이 뿌듯해졌다.
이 집 할머니도 자식들은 모두 도시로 나가 있고, 할머니 혼자 집을 지키며 살고 계셨다. 조금은 안타까웠다. 멀리 떠나 살고 있는 자식들을 뭐라 할 수도 없는 일이고, 이제는 지역 사회 문제였다. 우리 외할머니는 우리가족과 함께 살아도 항상 외로워 보인다. 같이 살아도 혼자이고, 혼자 살아도 혼자인 것이 노인의 모습인가 보다.
이제는 젊은 우리가 책임져야 할 일일 것이다. 노인문제를 어떻게 잘 해결하느냐 하는 문제가 선진국으로 가는 길이 될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나는 아직 모른다. 노인들이 그저 조금이라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면 마음이 편할 것 같은 토요일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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