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청자가 걸어온 길 (2)
부산 APEC 정상회담 국빈 선물용
합 만찬식기 제작 총괄 납품을 하기까지
전 강진청자박물관 연구개발실장 윤태영
국보 220호인 청자상감 용봉모란문개 합의 재현은 결코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특히 작업을 하려면 시간적 여유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부족하다는 점이 가장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미 엎질러진 물을 다시 그릇에 담을 수는 없었다.
그런데 우리는 청자상감 용봉모란문개 합의 무늬가 원래 모란인 것을 운학무늬로 하기로 협의를 했다. 모란 무늬는 시간이 많이 걸리지만 운학무늬는 모란 무늬에 비해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얼마나 다급했으면 국보 그대로 재현하지 않고 모란무늬 대신 운학무늬를 넣으려 했겠는가. 어쨌든 그렇게 결정해 놓고 작업에 들어갔다. 첫 번째 순서는 성형작업이었다. 수 백 개의 제품 규격이 일정해야 되기 때문에 석고틀을 짜는 게 급선무였다. 국보급 합 모양이나 크기, 형태 등을 그대로 하기 위해 석고틀을 짠 다음 만들기 시작했다. 이는 청자상감 운학국화문 합이 되는 첫 번째 절차였다
성형작업이 끝난 작품은 문양 작업을 하는 조각이었다. 하지만 모란 대신 더 쉬운 운학을 새기는데도 시간이 촉박했다. 하루 종일 일에 매달리면서 퇴근 시간이 없이 날마다 밤 10시까지 작업에 매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약 20일간을 야간작업한 끝에 950도 정도에서 초벌구이가 끝난 작품에 유약을 발랐다. 이른바 시유작업이었다. 그 과정에서 문양작업이 끝난 작품은 완전히 말라야만 되는데 덜 된 상태에서 가마재임을 한 후 초벌구이를 하게 되자 그릇이 터지고 균열이 생겨났다. 소위 파난 작품이 생겨난 것이다.
그러면서 초벌구이는 강행됐고 문양작업은 10월 초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작품이 되는대로 초벌구이를 했고, 초벌구이에서 작품을 선별하여 시유작업을 하는 일들이 계속됐다. 유약을 발라야만 본벌구이로 들어가기 때문에 이 작업은 거의 마지막 단계라고 볼 수 있었다.
본벌구이를 할 때는 전날 가마재임을 한 후 그 다음 날 새벽 가마 앞에 홀로 서서 기도를 하였다. 소주와 정한수를 떠놓고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를 했는데, ‘이 가마에서 아무 탈 없이 비취색의 용봉모란문개 합이 나오게 해달라“며 ’불이 잘 때져서 좋은 작품이 나와 무사히 납기일을 지킬 수 있도록 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이 세상 태어나서 어찌 기도를 한 두 번 해보았을까마는 이 때처럼 간절하고 또 간절한 기도는 없었던 것 같다.
기도를 하면서 문득, 「고려시대무명도공」이 생각났다. 그들은 불을 가마에 지필 때마다 정수사 대웅전 법당에서 무릎을 꿇은 채 부처님께 간절히 기도했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간절한 마음이 하늘에 닿았을 때라야만 비로소 명품은 탄생될 수 있을 것이었다.
이윽고 불이 댕겨졌다. 잉걸불처럼 장작이 무섭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심장이 타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실패가 있으면 큰일 날 일이었다. 납기일은 11월 12일까지였다. 그런데 가마에서 꺼낸 작품은 100%의 성공률이 아니었다. 불을 땐 후 3일간 가마를 식히면서도 식는 과정조차 애간장이 탔는데, 다행히도 좋은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꺼내보기 전까지는 가슴을 졸이고 숨이 턱에까지 올라왔으나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그런데 국보 220호 용봉모란문개의 정상급 선물용만 만드는 게 아니었다. 나중 들은 말이지만 당시 청와대에서는 국빈들이 어떤 음식을 들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다고 한다. 결국 궁중요리로 결정했는데, 그렇다면 무슨 용기를 쓰는 게 적합하겠느냐는 논의 끝에 청자였고, 청자하면 강진과 이천 중에서 골라야 했는데 강진청자가 선정되었다는 것이었다.
이 밖에도 조그만 술잔을 400여 개 만들어 납품을 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하루하루가 피 말리는 생활이었고, 야간작업에 쉬는 날이 없었지만 큰 보람으로 남는 일이었다. 그러나강진청자를 대내외적으로 알리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와 때를 같이 해서 각 언론사에서 인터뷰가 쇄도했다. 나는 자랑스럽게 국보 220호인 청자상감 용봉모란문개 합의 재현과 함께 APEC 정상회담 국빈 선물용으로 강진청자가 납품되었다고 신나게 떠들어댔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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