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송하훈
한편, 임금선조는 요동으로 사신을 보내 원병을 청하고 좌상 윤두수에게 명하여 평양을 지키도록 했으나 왜적이 쳐들어온다는 소문은 이미 나버린 터였다. 평양 백성들은 틀림없이 임금이 평양을 떠날 것이라 믿고 뿔뿔이 흩어져버렸다. 그러자 임금 선조는 백성들이 성에 들어오도록 종용했지만 왜적 또한 대동강가에 나타난 후였다.
황대중은 미리 종묘와 사직의 위판을 모시고 성문 밖으로 나갔다. 평양까지 모셔온 위판이었기 때문에 목숨을 걸고라도 지켜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이속(吏屬)들을 중심으로 한 백성들이 눈에 핏발을 세운 채 길을 가로막았다. 그들은 시퍼런 칼을 빼들면서,
“너희들은 도망을 치려고 작정을 해놓았으면서 왜 우리를 불러들이는 것이냐? 너희들은 도망가서 살아남고 우리는 왜적의 손에 어육이 되게 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하고 윽박질렀다. 어떤 백성은 몽둥이를 들고 황대중과 함께 한 몇몇의 병사들을 후려치기까지 했다.
이때 유성룡이 나타나 우두머리 쯤 되는 사람에게 일렀다.
“전하께서는 평양성에 남아서 왜적과 싸울 생각을 갖고 계시니라. 너희들과 함께 성을 지켜내고자 하는 것이 주상전하의 뜻이고, 그래서 성을 빠져나간 사람들을 오라 일렀는데 이 무슨 난동이란 말인가? 용서할 수 없는 일을 너희들은 저지르고 있다는 것을 모르겠느냐?”
유성룡의 말에 그가 이내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했다.
“전하께서 성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가신다는 소문을 듣고 분개한 나머지 이런 망동을 저지른 것인데, 대감의 말씀을 듣고 보니 소인이 우매하고 용렬했습니다.”
그는 모인 무리들을 데리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사실 조신(朝臣)들은 왜적의 침공이 지척에 있으므로 평양성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피난을 가자고 주장하고 있는 터였다. 그러나 유성룡의 생각은 달랐다. 서울이 함락되었을 때 이미 군사는 물론 백성들까지 도망을 가버린 후여서 도성을 지킬 수 없었지만, 평양은 대동강이 성 앞에 가로막고 있고 민심도 자못 안정되어 있으므로 며칠만 잘 지켜내면 명나라 군사가 반드시 와서 구원을 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전하께서 이곳까지 오신 것은 명나라의 도움을 받기 위해서였어요. 그러나 더 깊숙이 들어가면 좋을 것 같지만 왜적이 조선팔도에 다 깔려있는 형편이니 우리가 간 곳을 따라 왜적이 오지 말란 법이 없지요. 오히려 더 위험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조신들의 식솔들이 미리 피난을 갔기 때문에 함께 가고자 주장을 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유성룡이 황대중에게 안타까운 시정을 털어놓았다. 그러나 왜적의 수가 수 천 명이나 대동강가에 주둔하고 있었으므로 황대중은 서둘러 평양성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임금 선조 또한 영변을 떠나 박천으로 향했는데, 막상 평양성이 함락되었을 때 참지 황정식이 왜적과 싸우다가 목숨을 잃었다.
“아아, 그대가 죽다니, 하늘이 무심하구나.”
참지 황정식은 아무런 유언 한 마디도 못한 채 거친 숨을 몰아쉬더니 그만 고개를 젖혀버렸다. 한이 남아서인지 두 눈을 감지 못하자 황대중이 오른 손으로 눈꺼풀을 덮어주었다. 그리고 주변을 잠시 살펴보는 사이 적병 하나가 황대중마저 죽이려고 일본도를 높이 치켜들었다.
“이얏!”
일본도가 허공을 가르기 전 황대중이 탄 애마가 앞발을 번쩍 치켜들고 적병의 어깨를 걷어찼다. 놀라운 일이었다. 숱한 전쟁터에서 말과 함께 적과 싸우기 마련이지만 말이 먼저 적에게 달려드는 경우는 일찍이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황대중의 애마는 적병의 시퍼런 칼도 무섭지 않았는지 앞발로 걷어차 버린 것이었다. 왜적이 허수아비처럼 픽 쓰러지자 이번엔 뒷발로 몸뚱이를 걷어찼다. 적병의 입에서 붉은 피가 솟구쳤다. 땅바닥에서 뒹구는 적병을 이번엔 이빨로 물어뜯었다. 말 위에 탄 황대중이 번쩍 칼을 들어 적병의 목을 내리치자 목과 몸뚱이가 두 동강되었다.
황대중은 적병을 물리치는데 애마가 먼저 달려드는 것을 보고 크게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내가 너를 만난 것은 운명이구나. 짐승도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던지는데 이제 너는 나랑 함께 운명을 함께 하자꾸나.”
말의 목덜미를 한참동안 쓰다듬어준 황대중은 임금의 행차를 따라 의주로 향했다. 의주는 압록강에 있는 읍성으로 강을 건너면 명나라 땅이었다. 조선의 끄트머리까지 피난을 온 셈이었다. 명나라에서는 평양성이 적의 손에 떨어진 줄 알고 장수 참장(參將) 대모(戴某)와 유격장군 사유(史儒)가 진군하다가 의주에 머물렀다. 참으로 한심한 나라꼴이 아닐 수 없었다. 조선의 임금이 명나라와의 국경을 이루는 의주까지 와서 목숨을 부지하는 꼬락서니여서 조선의 백성이라면 땅을 치고 통분할 일이었다.
역시나 임금 선조가 의주까지 피난 온 것은 명나라로 갈 궁리를 했었기 때문이었다. 불과 며칠만에 조선천지를 쑥대밭 만들 듯이 온 삼천리강산을 짓밟은 왜적 앞에서 임금 선조는 명나라로만 갈 생각만 했다. 22일 의주에 도착한 다음 날, 그러나 임금 선조는 신하들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쳤다. 만일 임금이 명나라로 망명을 강행했더라면 임금이 없는 조선은 이미 왜적의 수중에 완전히 떨어진 나라가 되었을 것이었다.
“전하. 명나라는 조선을 반드시 지켜줄 것이옵니다. 구원병을 보내지 않고서는 명나라의 체면이 서지 않는 일이옵고, 왜적의 형세가 둑을 무너뜨릴 만큼 강하다고는 하나 전국 각처에서 의병이 일어나고 있으므로 반드시 왜적은 물러갈 것이옵니다.”
신하들은 눈물을 흘리면 간곡히 만류했다. 임금 선조는 하는 수 없이 명으로 망명하는 계획을 접었다. 왜적들은 단숨에 의주까지 달려올 줄 알았지만 다행히도 평양성에 머물렀으므로 이 같은 다행이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의주에 임시 조정을 설치하고 뒷일을 도모할 수 있었다.
한편, 조선은 쑥대밭이 되었는데도 전라도만큼은 왜적의 수중에 넘어가지 않고 있었다. 평양이 떨어지고 임금 선조가 의주까지 몽진을 했는데도 전라도만큼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왜적은 속전속결로 조선을 치기에 바빴고, 명나라를 치기 위한 전쟁을 일으킨 왜적으로서는 그 작전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부산과 서울, 그리고 평양이라는 공격 루트만이 전부였던 것이다.
전라도를 쉽게 진격할 수 없었던 것은 이순신이 있었고, 임금 선조가 의주까지 몽진을 가는 동안 이순신은 군사를 모으고 식량을 비축했다. 이 또한 조선의 불행 중 다행한 일이기도 했다.
이순신은 43세라는 나이에 육군으로 함경도에서 근무를 했다. 1587년의 일로 여진족이 침입했다. 그 여파로 이순신은 백의종군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이듬해 1월 두만강을 넘어 급습한 여진족을 급습해 그 전과를 인정받아 백의종군을 면할 수 있었다. 이순신이 충남 아산으로 내려가 하는 일 없이 세월을 보내고 있었을 때, 전라순찰사 이광이 이순신에게 군관이 되어 줄 것을 명했다. 이순신은 이를 기반으로 삼아 정읍현감이 될 수 있었고, 나중에는 전라좌수사에 오르게 되었다.
그런 이순신이 첫 출동을 나갔을 때는 1592년 5월 4일 새벽이었다. 판옥선 24척, 함선 15척, 포작선 46척으로 총 85척에 달한 함대를 이끌고 전라좌수영이 있는 여수에서 출동했다. 경상우수영 함대가 있는 경상도 당포에서 합류하기로 약속했기 때문이었다.
“어서 오시오. 전라좌수사 영감.”
원균은 이순신을 반갑게 맞이한 다음 앞으로 싸울 전투에 대해 의논을 했다. 그 같은 의논은 이순신과 원균이 연합 함대로써의 결성이기도 했다. 다음 날, 새벽 왜적의 있다는 정보에 의해 연합 함대는 옥포로 부지런히 노를 저었다.
“모든 군사는 가벼이 움직이지 말고 태산같이 정중히 하라!”
처음 왜적을 만난 조선 수군은 전투를 눈앞에 두고 어깻죽지가 사뭇 오그라지고 있을 때 이순신의 벽력같은 목소리가 전군을 찌렁찌렁 울려 퍼졌다. 조선 함대는 이순신의 지휘 아래 일제히 옥포에 있는 왜적을 향해 돌진했는데, 도도 다카토라는 30여 척의 함선을 거느리고 정박해 있었다. 그들은 사방천지가 연기로 가득할 만큼 불을 지르며 노략질을 하다가 조선 수군이 나타나자 아연실색을 하며 슬금슬금 해안선을 따라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조선 함대는 밀어붙이듯 가까이 다가가자 다급한 나머지 조총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그러나 조총은 불행하게도 조선함대에 미치지 못했다. 조총의 사정거리는 턱없이 모자라 총알은 모두 바다 위에 피웅피웅 떨어질 뿐이었다.
“쏴라!”
이윽고 조선 함대는 이순신의 명대로 그들을 포위하며 포와 화살을 쏘았다. 조총과 포와의 대결은 그 결과가 뻔했다. 수 없이 쏟아지는 포로 인해 왜적의 함대는 산산조각이 나면서 옥포 앞바다가 불바다가 되었다.
왜적들은 도저히 어떻게 해볼 재주가 없었던지 모두 산으로 도망을 갔다. 나머지 잔적들을 죄 처치하고 싶었지만 산세가 험해 이순신은 아쉬움을 뒤로 한 채 거제도 북쪽에 있는 영등포 앞바다로 향했다. 왜적 함선 26척의 궤멸. 이것이 이순신의 해전에서 첫 작품이었다.
1593년이 5월 8일. 이순신은 왜적이 진해 고리랑에 정박해 있다는 첩보를 듣고 즉시 그곳으로 향했다. 그런데 고성 적진포에 이르렀을 때였다. 왜적의 함대 13척이 정박해 있었다. 그들은 안심하고 약탈을 자행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나타난 조선 수군의 위용에 잔뜩 겁을 먹고 싸울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모두 산으로 도망을 쳤다.
이순신은 13척의 왜적 함대를 콩가루 부수듯이 괘멸시켜 버렸다. 포탄이 떨어질 때마다 왜적의 배는 불길을 솟구치며 바다로 가라앉았다.
“이게 상상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인가”
적진포에 주둔하고 있던 왜적의 배 13척을 남김없이 괘멸시키고 났을 때 충격적인 소식이 날아들었다. 임금 선조가 평안도로 몽진을 갔다는 것이었다. 이순신이 출정을 한 날 임금 선조는 도성을 버렸고, 다시 평안도로 피신을 하고 있을 때 이순신은 적진포에서 왜적을 깡그리 섬멸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임금 선조가 한양을 버린 것도 통분한 일인데 평안도까지 몽진을 했다는 소식은 조선수군에게 있어 큰 절망감이었다. 통분한 나머지 승리의 기쁨도 고사하고 서로 얼싸안으며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조선수군이 싸움에서 이기고 있을 때 그제야 조정의 피난 소식이 들려온 것이었다. (다음 호에 계속)
다음기사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