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의 명차
1939년 2월 24일 모로오까 다오쓰씨는 쓰루야(鶴屋, 학집 여관:역자 주)의 2층에서 만덕산(해발 408m)이 남서쪽으로 우뚝하고 상쾌하게 솟아있는 것을 보았다. 이곳에서 오 리 반이나 떨어져서 자동차도 소용이 없다기에 걷기로 맘을 먹었다. 강진에서 해남에 이르는 2등 도로의 약 1리만에 학산리로부터 왼쪽으로 갈라졌다. 등외 도로(等外道路)이긴 하지만 길의 폭도 넓고, 노면도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왼쪽에 강진만이 멀리 보이며 칠량이나 대구의 산들이 우뚝하게 솟아 잇다. 간척지를 흐르는 저수지의 물소리는 한없이 들린다. 바람이 매섭지만 완연한 봄이다. 저쪽 이쪽의 보리밭에는 보리를 밟는 농부라든지 조선 아낙네의 일하는 모습도 보인다. 덕남리 부근부터는 만덕산계의 산벽을 서쪽으로 받아 바람도 자고 기온도 따뜻해져 간다. 마을에는 동백나무가 드문드문 보였다.
마을 바깥부터 지름길로 가기 위해 오른쪽 산길로 들어갔다. 약간 오르막길이라 온몸에는 땀이 흥건하다. 잠시 뒤 골짜기에 이르니 맑은 물이 졸졸 흐르고 있었다. 난대수종도 이곳저곳에 자라고 있다. 산길을 힘들여 올라가다 보니 소나무숲 밑에는 고려자기 도굴 흔적이 많다. 청자의 좋은 파편도 있다.
산의 등성이에 도착하니 그곳부터는 만덕사의 사유림으로서 낙엽수가 우거지고 그 속에는 대나무, 동백나무, 차, 후박나무, 생달나무 등이 자라고 있다. 만덕사의 대웅전은 기슭 가까운 쪽 나무에 숨겨져 보이다 말다 하였다. 시내를 따라 내려가면 절 근처가 되는데, 차나무가 자연 그대로 바위 틈, 대나무·잡목 속에 우거져 큰 것은 석 자나 되었다.
절에는 산문(山門)이나 담은 없고 남쪽에 동백나무가 무성해 그 잎이 햇빛에 비치어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절은 매우 황폐해 지붕의 일부가 떨어지기 시작한 곳도 있었다. 절은 남향의 양지바른 곳으로 동쪽은 트여서 강진만이 보이고, 서쪽과 북쪽은 만덕산을 등지고 있다. 숲속에서는 작은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들린다. 만덕사를 이전에는 백련사(白蓮寺, 백련사가 옳다-역자 주)라고 하였는데, 12년 쯤 전에 이름이 바뀐 것이다. 다산 선생이 있었을 때는 이처럼 황폐되어 있지는 않았을 터인데, 이와 같은 절의 황폐는 참으로 안타까웠다. 큰 비석이 남아 옛말을 회상시켰다. 주지의 살림집은 대웅전의 동쪽에 있는데 그 뜰 앞에는 대 홈통의 물이 졸졸 떨어지고 있다. 다산 선생이 머무른 집은 주지의 살림집 바로 밑의 보리밭에 있었던 집인데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에 헐렸다고 한다.
그 보리밭의 보리는 파릇파릇 뻗었고 밭두둑에는 시누대가 조용히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화창한 봄날은 보리밭의 옛날을 생각나게 하는 것 같은 따뜻함이다. 여기에서 주진인 성왕현(成王玄,52) 씨에게 차에 관한 것, 만덕사에 관한 것, 다산 선생에 관하여 들은 것을 적어나갔다.
성왕현 씨는 강진읍 목리에서 태어나 해남의 대흥사에서 21세부터 36세까지 있었고, 나주면의 다보사(多寶寺)에서 7년, 다도면의 불회사에서 6년, 장흥면의 신흥사(新興寺)에서 1년을 지냈고, 이 절에 와서 2년째라고 하였다. 이 절의 사유림은 63정보이다. 장흥군의 일부와 강진군 내의 절을 관할하는 본산(本山)이었는데, 1912년에 재산이 적어져서 경영상 대흥사에 병합되어 말사가 되었다고 한다.
만덕사의 내력에 관해서는 <만덕사지萬德寺誌>에 자세히 나와 있는데, <만덕사지> 진본은 불에 타 없어지고 그 뒤 해남 대흥사의 법무계(法務係) 스님에 의해서 필사 된 것으로서 상·하 2책이다. 이 <만덕사지>, <대흥사지>는 다산 선생에 의해서 교정된 부분이 많다. <만덕사지>에서 차와 관계있는 일절을 참고로 들어본다.
-- <여지승람>에 이르기를 백련사는 만덕산에 있다. 신라시대의 창건으로서, 고려의 중 원묘 국사가 중수하고, 조선 세종시대의 중 행호가 다시 중수하였다. 탑, 비석 및 세 부도가 있다. 또 만경루, 명원루가 있는데 남쪽의 큰 바다에 임하고 있다. 동네(절 부근의 일대)에는 모두 소나무, 잣나무, 조릿대, 왕대가 가득하고, 동백나무가 벗하여 청록색을 늘려 연중 변함이 없다. 참다운 정경이다. 이청(다산의 제자)이 살피건대, 동백이란 것은 유차의 속명이다(이 사항은 만덕사지를 지은 이의 설명이다)
※참고 : <만덕사지>는 학림(學林), 기어(騎魚:아암 혜장 선사의 제자인 자홍(慈弘)은 학승(學僧)으로 초의 선사와 <대둔사지>를 엮었다) 등이 편집한 것으로서 다산 감정(鑑定)으로 되어 있다. <차조>에 ‘차의 품질이 매우 좋아서 여러 해 이래로 따는 이가 점차 많아지매 중이 감당할 수가 없어서 차 또한 줄었다’고 하였다. 이 기록에 의해서 대체로 만덕사의 풍경도 회상되지 않으리.
백련사의 시 김유
명원루 높아 시야가 새로우니
멀리 보이는 푸른 바다 티끌 없는 거울이네.
기댄 울타리의 길게 자란 대 바람받이에서 울리고
난간 곁의 고요한 눈 속의 봄이라.
나그네의 시편 사랑은 흥 돋우기에 뛰어나고
산승은 다과로 사라 만류를 아뢰네.
반나절 내려다보다 돌아오니
이후 구름과 남기는 꿈속에 자주 들어가네.
백련암 충경 스님(원감 국사)
밥 한 바리에 나물 한 쟁반이라
시장하면 먹고 고달프면 잠을 자네.
물 한 병에 차 한 남비라
목마르면 들고 와서 손수 달인다네.
대지팡이 하나와 둥근 부들방석 하나
다니기도 선이요 앉기도 선이라네.
다음에 청태전을 보이고 주지의 감상을 물었더니, 이것은 차라해서 자기가 어렸을 때(주지는 여기에서 거리가 가까운 강진읍의 목리에서 태어난 사람이다) 만덕사에서 노닐었을 무렵에 이 절에서 보았다. 옛날에는 각지의 절에서 만들었으나 지금은 만들지 않는다. 만드는 방법은 처음에 차를 따서, 쪄서, 절구에 찧어서, 대나무의 테를 널빤지 위에 얹은 속에 넣고, 손가락으로 눌러 굳혀서 만든다. 이때 찻잎이 굳어지면 천을 깔지만, 연하면 천을 깔지 않는다. 자기도 만든 적이 있다. 도암면의 수파리에서도 35년쯤 전에 만든 것을 확인하였다.
사용법은 차를 뭉근한 불로 구워서 2,3개를 탕관에서 끓인 물속에 넣고 마신다. 하루에 2,3회나 마시는데 대체로 보림사 부근의 마시는 법과 변함이 없다. 찻그릇도 이렇다 하게 정한 것은 없다. 이상을 말하면서 향응을 받은 차는 작설차였다. 물도 좋다. 이 차야말로 우리들이 조선의 사람들에게 마시게 하여도 좋은 차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의 녹차보다도 조금 다른 맛으로서 빛깔도 조금 붉으스레한 빛깔을 띠고 있지만 어딘가에 향미(鄕味)가 숨어 있었다. 이 차는 주지가 만든 것이라고 한다. 찻잎의 품질이 좋은 것인지 금후 전문가의 감정에 맡기기로 했다.
주지의 안내를 받아 부처님 앞에서 참배하고, 또 동백산이랑 대나무산이랑 조사하였다. 동백씨는 한 해에 두 섬 쯤이 열매 맺히고, 한 되에 40전쯤에 팔린다. 동백기름으로 한다면 한 되에 5원쯤이 된다는 것이었다.
사지(寺誌)라든가 차에 관해서 좀더 조사를 하고 싶지만 해가 산에 숨을 것 같다. 만덕리의 조사에 마음을 빼앗겨서 만덕사를 뒤로 하였다.
남쪽의 만덕리는 4,5정(760~950m)이나 될런지? 터벅터벅 내려가니 보기 드물게 깨끗한 마을, 대숲속에서 태어난 듯한 마을, 대나무의 살아있는 울타리에 에워싸인 마을이었다.
여기는 윤씨의 한 가문이 많다. 마을에는 감나무도 많고 집도 깨끗하다. 운씨 선대의 산소에는 지름 한 자 될 만큼 큰 비자나무가 두세 그루 서 있다. 근래 베인 듯한 비자나무도 있었다. <정리 송하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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