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18년의 강진유배생활
1) 사의재(四宜齋)
다산이 강진으로 유배를 온 것은 1801년 음력 11월 22일 내지 23일 쯤 된다. 추운 겨울 날 강진읍에 도착하니 추운 겨울날이기도 했지만 사람들이 가는 곳마다 문을 부수고 담장을 무너뜨리며 상대를 해주지 않았다. 유배 온 사람을 천대했기 때문이었다. 1801년 신유교옥(辛酉敎獄)으로 영일만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강진에 이배된 것이다.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 아닐 수 없었다. 특히 나주 율정점(지금의 나주시)에서 흑산도로 귀양 가는 형 약전과 헤어진 직후였다.
갈 곳이 없어 망설이고 있을 때 동문 밖 주막집 노파가 다산을 가엽게 여긴 나머지 방 하나를 내준다. 그 집이 오늘 날 사의재(四宜齋)이다. 사의재는 다산이 지은 방의 이름이다. 스스로 마땅히 해야 할 네 가지는 생각은 맑게, 용모는 엄숙하게, 말은 과묵하게, 행동은 중후하게였다.
다산은 그곳에서 4년을 지낸다. 그 4년 동안 ‘아학편후의’란 2천 자 아동용 책자를 만들어 천민의 자식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아전의 자식들 몇몇을 제자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그 때 다산이 가르쳤던 제자는 황상, 황경, 황지초, 이청, 김재정 등이다.
여기에서 다산은 제1제자인 황상을 두고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다. 처음 만난 지 일 주일이 지나 다산은 황상에게 삼근계(三勤戒)를 써 주었는데, 나중 약전은 황상을 크게 칭찬하는 서신까지 보낸다.
2) 보은산방
보은산방은 강진읍을 보듬고 앉아있는 보은산 중턱 고성사를 말한다. 1805년 4월, 다산은 백련사를 갔다가 아암 혜장 스님을 만나게 되는데, 혜장 스님은 다산의 인격에 감복되어 자주 찾아갔다. 그들은 주로 고성사에서 만나곤 했다. 그런 사이 1805년 겨울, 큰아들 학연이 찾아왔다. 다산은 혜장에게 부탁해서 고성암에서 지낼 수 있도록 했다. 아들 학연과 함께 지내며 공부를 시킬 생각에서였다. 두 부자는 그야말로 열심히 공부를 했다. 천길 마다않고 찾아온 아들 학연을 가르치는 다산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마땅히 아비로서 글공부를 가르치긴 했지만 곤궁한 유배생활 속에서 아들 공부까지 가르쳐야 했으니 먹고 자는 일이 쉽지만은 않았을 것 같다.
3) 이학래 가(家)
제자 이학래는 보은산방에서 한 겨울을 나고 다시 사의재로 내려온 다산에게 자신의 집 사랑채로 모셨다. 1806년의 일이었다. 세 번째로 거처를 옮긴 것인데, 사의재 좁은 방에서 지내기가 너무 답답했던 모양이다. 다산은 이학래의 사랑채에서 지내면서도 편치는 않았던 것 같다. 그 때 좋은 추억, 좋은 기억이 많았더라면 나중까지 두 사람의 관계는 좋았으리라고 여겨진다. 그래서 그런지 이학래 집에서 지낼 때의 행적은 뚜렷한 것이 없다.
4) 다산초당(茶山草堂)
1808년 다산초당의 주인인 윤단(尹慱)의 후손들은 사의재와 이학래의 집에서 맘 편히 지내지를 못하는 다산을 모셔왔다. 탐진만이 내려다보이고 오솔길을 통해 백련사를 다녀올 수 있는 숲 속의 다산초당은 다산에게 있어서 다산학을 완성시킬 수 있는 최고의 환경이었다.
마음 놓고 사색을 하고 책을 읽고 시를 지을 수도 있는 분위기도 좋았고, 달이 뜨면 달뜨는 대로, 별이 뜨면 별 뜨는 대로 아름다운 풍광 속에서 지낼 수 있었다. 이같이 다산으로 하여금 학문에 매진할 수 있도록 도와준 이가 귤동의 윤씨 일가였다. 다산은 본래 있었던 초당의 동쪽과 서쪽에 동암과 서암을 새로 지었다. 연못을 파고 인공 폭포를 만들었다.
다산은 이곳에서 엄청난 저술 작업을 했다. 게다가 18제생으로 알려지는 제자들과 함께 경학연구에 몰두할 수 있었다. 1810년 한 해 동안에 <가례작의(嘉禮酌儀)>, <상례사전(喪禮四箋)>. <시경강의보(詩經講義補)> 등 9종을 저술할 정도였다.
다산은 다산초당에서 제자들을 가르침에 있어 초의는 초의대로, 황상은 황상대로 제자들의 수준과 재능에 맞춰 일침을 가하곤 했다. 특히 아암 혜장과의 인연은 각별하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날 밤 함께 나누었던 대화이다. 이미 밤은 깊었는데, 달빛은 휘영청 밝아서 대낮 같았다. 그 때 다산이 묻는다.
“그대는 시방 자고 있는가?”
“아닙니다.”
“아까 제자들에게 주역을 말했을 때 건괘(乾卦)에서 초구(初九)는 무엇을 말한 것인가?”
“구(九)라는 것은 양수(陽數)의 끝을 말합니다.”
“그럼 음수의 끝은 무엇인가?”
“십(十)에서 그칩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곤초십(坤初十)이라고 하지 않았을꼬?”
다산의 질문에 혜장은 한참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더니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다산의 옷깃을 부여잡으며 말했다.
“산승이 주역을 20년 간 공부를 했으나 헛된 물거품입니다. 대체 곤초육(坤初六)은 무엇을 뜻합니까?”
“기수(奇數)로 돌아가는 법은 무릇 최후의 수가 4거나 2일세. 모두 기수라고 여기지만 2와 4는 우수(偶數)가 아닌가.”
다산의 말에 혜장이 통곡할 듯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우물 안 개구리와 초파리는 잘난 척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부디 저를 인도해 주십시오.”
다산은 초의와도 친분이 있는 관계로 혜장과 사별한 다음 해 제자 윤동을 데리고 초의와 함께 월출산 백운동을 찾아간다. 이 때 초의는 백운동의 승경을 그리는데, 다산은 다산도를 그려서 후세에 남겼다. 백련사는 다산이 자주 다녔던 곳으로 지금도 다산초당과 백련사 사이에는 오솔길이 나 있다. 작가 한승원 선생은 이 오솔길을 가리켜 ‘들숨날숨’이라고 표현했다. 다산초당에서 차를 끊여 마시며 저술활동을 하고, 제자들을 가르치며 살았지만 고향 땅을 멀리하고 지내는 다산의 고독은 형언할 수 없었으리라.
다산은 평소 자주 찾는 백련사 가는 길에 <춘일유백련사(春日遊白蓮寺)>란 시를 짓기도 했다.
조각구름 흘러가며 흐린 하늘 개이고
냉이밭에 흰나비 펄럭이며 날을 때
우연케도 집 뒷산 나무꾼 길 따라서
숲을 헤쳐 나가보니 보리밭 언덕이네
궁벽한 산촌 봄날 아는 노인 왔다면서
벗 없던 거친 동네 각승(覺僧)은 어질었다.
더구나 도연명(陶淵明)이 찾은 듯 보아주어서
나에게 산경표(山經表) 한두 권을 설명해 주네
5) 유배지에서 일궈낸 학문의 산
1. 다산시
다산의 시작품은 대부분 개인의 한가로움이나 시율을 좋아하지 않았다. 반면, 다산은 도덕성, 현실성에 더 무게를 두었다. 널리 알려진 ‘탐진어가’나 ‘애절양’이 그것을 대표하고 있다. 초의가 시란 무엇인가 하고 물었을 때 다산은 “사상의 표현이다. 사상이 단련되지 않으면 좋은 시를 쓸 수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좋은 시를 쓸 수 있는가? 그것은 천인 성명의 법칙을 연구하고 인심 도심의 분별을 살피되 그 때 묻은 잔재를 씻어내는 길”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다산은 ‘용산리’ ‘파지리’ ‘해남리’란 시를 통해서 칼처럼 날카롭고 구름처럼 높은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탐진어가’ 역시 모두 10장으로 세금에 시달리는 농·어촌을 묘사하면서 어부의 고통을 노래했던 것이다.
2. 다산학
다산은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주역, 상례, 시경, 춘추, 논어, 중용, 맹자, 대학, 악서(樂書), 상서(尙書) 초고 등 육경사서학을 끝냈고, 해배 전후 3년 사이에는 일표이서를 정리할 만큼 왕성한 저술활동을 펼쳤다.
또한 경세유표(經世遺表)와 목민심서(牧民心書)를 저술했으며, 해배 직후 흠흠신서를 지어냈다. 이러한 저술을 해온 다산이지만 왕도의 중심사상을 목민심서를 통해 구현하려고 애썼다. 오늘 날 직위고하를 막론하고 목민심서를 가장 으뜸 지침서로 여기는 것도 그 때문이다. 시대는 변했어도 목민정신만큼은 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목민심서의 깊은 의미라 할 것이다.
다산이 지은 흠흠신서는 일종의 법률서로써 중국과 조선의 형사재판 사건을 열거한 내용이다. 또 중국의 재판과정이나 조선의 역대 형사사건을 다루었다. 이와 같이 형정론을 저술한 것은 당시 조선의 난맥상을 바로잡아보고자 한 줄 한 줄 써내려간 다산이었다.
다산은 과학에도 한 발 앞선 선구자였다. 1789년 겨울, 임금이 거동할 때 한강에 설치하는 부교 공사가 있었는데 다산이 직접 설계를 했다. 또 기중기를 만들어 성을 쌓기도 했다. 인력을 감소시키면서도 무거운 것을 척척 들어내는 활차를 통해 과학을 증명해 보인 다산이었다.
3. 강진을 떠난 다산
힘들고 고독했으며 자유스럽지 못한 유배 18년을 다산은 학문과 함께 보냈다. 다산 18년 유배생활을 한 장의 종이에 담는다는 것은 애시당초 무리일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우리가 잠시라도 다산을 되새김질하면서 다산의 털끝 하나라도 붙잡아보려는 의도 때문이다.
다산은 참으로 위대하게 강진에서 18년을 보냈다. 그가 강진으로 유배를 오지 않았더라면 방대한 저술이 이루어졌겠는가 하는 의구심을 낳게 한다. 왜냐하면 저술활동은 곧 자기와의 싸움이기 때문이다. 높은 벼슬자리에 앉아 정치에 빠졌더라면 천하의 다산도 이처럼 방대한 저술을 없었을 것이라고 가정해 볼 때, 문득 사마천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죽음보다 더 처참한 궁형을 받고도 그는 사기열전을 쓰기 위해 세상의 굴욕을 참았던 것이다.
예수가 광야에서 헤매는 고통이 없고서야 어찌 위대한 인류의 스승이 될 수 있었겠는가. 싯타르타가 설산에서 6년 고행이 없었더라면 또한 인류의 스승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다산의 강진 유배 18년의 세월은 다산으로 하여금 위대한 사상가로 만들었다. 적어도 인류의 사상가로써 동서양에서 손색이 없는 한국이 낳은 사상가인 것이다. 그런 위대한 사상가로 만든 토양은 강진이다. 강진의 바람, 풀, 햇빛, 강과 바다, 하늘과 땅이 다산을 위대하게 만들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다산은 1818년 9월 15일 향리로 돌아갔다. 그러나 막상 도착한 향리는 불편함과 가난이었다. 꿈에도 그리던 고향이었지만 양식이 떨어질 정도였으니 그의 마음은 오히려 강진으로 한걸음 달려왔을 성 싶다. 그래서 동백은 잘 자라고 있느냐, 찻잎은 때맞춰 잘 따내고 있느냐고 편지글을 썼던 다산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다산을 그리워하고 있고, 다산 역시 강진을 그리워하는 과정에서 그의 제자 황상이 있었음을 기뻐하지 않을 수 없다. 다산은 일찍이 그의 재능을 알고 시인으로 키우기 위해 삼근계의 가르침을 내렸다. 황상 역시 스승의 뜻을 따라 30여 년을 열심히 공부했다.
최근 강진에서 황상이 기거했던 일속산방이 알려지고 세미나를 여는가 싶더니 서울 정민 교수에 의해 황상의 인물됨이 알려지고 있다. 이 또한 다산을 아는 만큼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송하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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