섭정
선비는 자신을 알아주는 이를 위해 죽는다
섭정은 지 땅의 심정리 사람이다. 그는 사람을 죽이고 원수를 피해 어머니, 누이와 함께 제나라로 달아나 백정 노릇을 하며 지냈다. 오랜 세월이 흘러 복양 사람 엄중자가 한 나라 애후를 섬기다가 재상 협루와 원수지간이 되었다. 엄중자는 죽임을 당할까 봐 여기 저기를 돌아다니며 협루에게 복수해 줄 자를 찾다가 제나라에 이르렀다. 어떤 사람이 그에게 말했다.
“섭정이란 용사가 있는데 원수를 피해 숨어 지내며 백정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엄중자는 섭정의 집을 여러 차례 드나들며 그와 사귀기를 청했다. 하루는 술을 마련하여 섭정의 어머니에게 드렸다. 술자리가 한창 무르익자 엄중자가 황금 백 알을 내놓으며 어머니의 장수를 축원했다. 그가 이렇게 많은 돈을 주는 것이 놀랍고 이상하여 극구 사양했다. 계속 받을 것을 청하자 섭정이 사양하며 말했다.
“저는 어머님을 모시는데다가 살림이 구차하여 타향에 와서 개나 돼지를 잡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침저녁거리를 마련하여 어머님을 봉양하기에는 부족하지 않으니 당신의 돈을 받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자 엄중자는 주위 사람들을 물리치고 섭정에게 말했다.
“나는 오랫동안 원수를 갚기 위해 여러 제후국들을 돌아다녔소. 그런데 제나라에 와서 당신신의 의협심이 대단하다는 말을 들었소. 황금 백 알을 드리는 것은 어머님을 봉양하는데 쓰라는 것이오. 그래서 당신과 더욱 친하기를 바랄 뿐, 달리 무슨 뜻이 있겠소?”
섭정이 말했다.
“제가 뜻을 바꾸고 자신을 욕되게 하면서 시정에서 백정 노릇을 하는 것은 오직 어머님을 봉양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어머님이 살아 계시는 동안에는 제 몸을 남에게 바칠 수가 없습니다.”
섭정은 엄중자가 아무리 권해도 끝내 받지 않았다. 엄중자는 마지막까지 손님과 주인의 예를 다하고 떠나갔다.
많은 시간이 흘러 섭정의 어머니가 죽었다. 섭정은 장례를 마치고 상복을 벗은 뒤 이렇게 말했다.
“아! 나는 저자에서 칼로 짐승이나 잡는 천한 백정이다. 그러나 엄중자는 제후국의 경상인데도 내게 불원천리 찾아와 사귀자고 하였다. 나는 그를 냉대했다. 내게 무슨 공로라고 할 만한 것도 없는데 그는 황금 백 알을 주면서 어머님의 장수를 축원했다. 나는 극구 받지는 않았지만 그가 나를 알아준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와 같은 현인이 증오하는 원수가 있어 친히 나 같은 시골뜨기를 가까이하고 믿어 주었는데, 내 어찌 잠자코 가만히 있겠는가. 예전에 그가 나를 찾았을 때는 어머니께서 살아 계셔서 응하지 않았지만 어머니도 돌아가셨으니 나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일하리라.”
섭정은 서쪽 위나라 복양으로 가서 엄중자를 만나 이렇게 말했다.
“예전에 당신의 요구에 응하지 않은 것은 어머니께서 살아계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불행히도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안 계십니다. 당신이 복수하고자 하는 자는 누구입니까? 제게 맡겨 주십시오.”
엄중자가 자세히 말했다.
“나의 원수는 한나라 재상인 협루요. 그는 한나라 왕의 막내숙부인데 그 일족은 번성하여 수가 많고 거처 또한 경비가 삼엄하오. 나는 사람을 보내 그를 찔러 죽이려 했으나 끝내 성사시키지를 못했소. 오늘 당신이 나를 잊지 않고 찾아왔으니 수레와 장사들을 많이 보내 당신을 돕겠소.”
섭정이 말했다.
“한나라와 위나라는 서로 그다지 먼 거리에 있지 않습니다. 지금 죽이려는 자는 다른 나라의 재상이기도 하지만 국왕의 친족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많이 써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많으면 사단이 생길 수도 있고 사단이 생기지 않으면 말이 새 나갈 수가 있습니다. 말이 새 나가면 한나라의 모든 사람들이 당신을 원수로 삼을 테니 어찌 위험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섭정은 끝내 수레와 장사들을 사양하고 작별 인사를 한 후 홀로 떠났다. 그는 보검을 지팡이 삼아 한나라에 이르렀다. 한나라 재상 협루는 마침 관부에 앉아 있었는데, 주위에는 무기를 든 호위병들이 아주 많았다. 섭정은 곧장 들어가 계단으로 올라가서 협루를 찔러 죽였다. 그 모습을 본 좌우 신하들이 큰 소동을 일으키자 섭정은 고함을 치면서 수십 명을 베어 죽였다. 그리고는 스스로 자신의 얼굴 가죽을 벗기고 눈을 도려내고 배를 갈라 창자를 꺼낸 뒤 죽었다.
한나라에서는 섭정의 시신을 거두어 거리에 내놓고 그의 신원을 물었으나 아무도 아는 자가 없었다. 이에 재상 협루를 죽인 자가 누구인지 아는 자에게는 천금을 주겠다고 알렸지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섭정의 누이 섭영은 한나라 재상을 죽인 자가 있는데 한나라 사람들이 모두 그가 누구인지 몰라 시신을 거리에 내놓고 천금의 현상금을 걸었다는 말을 듣고 근심하며 말했다.
“그는 내 동생일 것이다. 아! 엄중자는 내 동생을 알아주지 않았던가!”
섭영은 곧장 한나라로 갔다. 저자에 이르러서 보니 죽은 자는 과연 섭정이었다. 섭영은 시신에 엎드려 애절하게 통곡하며 말했다.
“이 사람은 지 땅 심정리에 사는 섭정이란 자요.”
이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이렇게 말했다.
“이자는 우리의 재상을 참혹하게 죽여 대왕께서는 천금을 내걸고 그의 신원을 밝히려 하고 있소. 부인께서는 듣지 못했소? 어찌 일부러 와서 그를 안다고 하는 것이오?”
섭영이 대답했다.
“들었습니다. 내 동생 섭정이 모욕을 당하면서도 저잣거리에서 일했던 것은, 어머니가 계시고 내가 시집을 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어머니도 세상을 뜨고 나도 남편을 얻었습니다. 엄중자는 동생이 곤궁하고 보잘것없는 생활을 하는데도 친히 찾아와 사귀기를 청했는데 그 은혜가 아주 두터웠습니다. 그러니 동생도 어찌할 수 없었겠지요. 사나이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다고 했으니까요. 동생은 내가 아직 살아 있기 때문에 스스로 몸을 훼손하여 남들이 알아볼 수 없도록 한 것입니다. 내 어찌 죽음이 무서워 어질고 장한 동생의 이름을 없앨 수 있겠습니까.”
섭영의 말을 들은 한나라 사람들은 크게 놀랐다. 섭영은 하늘을 우러러 크게 세 번 소리를 지르더니 비통함에 젖어 울다가 섭정 곁에서 죽었다. 이 소문이 퍼지자 진나라, 초나라, 위나라 사람들이 이렇게 말했다.
“섭정만 훌륭한 것이 아니라 그의 누이도 장하도다. 그 누이는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고 천 리 험한 길을 달려와 시신의 신분을 밝혔으며, 끝내 비통함에 젖어 동생과 함께 한나라 저잣거리에서 죽었다. 만약 섭정이 이러한 사실을 알았더라면 자신의 목숨을 걸고 엄중자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을 것이다. 엄중자도 인재를 df아보는 눈이 있어 의로운 사나이를 얻었다고 할 수 있다”
그후 220여 년이 지나 진나라에서 형가의 사건이 일어났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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