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세계박람회 유치에 도움이 된다면 해외공관의 설치를 계획하고 있는 곳에 미리 화정이라도 서둘러서 박람회 유치에 힘을 더하자.”
노무현 대통령은 박람회 유치를 위해 계획된 공관을 서둘러 확정해서라도 찬성표를 늘려야 한다고 말할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왜냐하면 올림픽이나 월드컵은 개별 의원들이 비밀투표를 하지만 세계박람회의 선정은 98개 회원국가의 정부 대표가 표를 던지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2008년 여수세계박람회 유치를 위해 노력했지만, 2002년 12월 모나코에서 열린 세계박람회 총회에서 4차례에 걸친 연장 투표 끝에 중국 상하이에 패하고 말았다. 4년 뒤인 2006년 다시 유치전에 공식적으로 뛰어든다. 그러나 세계박람회 유치는 만만치 않았다. 올림픽이나 월드컵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세계 각국이 치열하게 경쟁을 벌였기 때문이다.
바다를 잘 아는 그분이 적임자다
당시 2012년 여수세계박람회 유치위원회를 구성하느라 골몰하던 사람들의 머리에 김재철이 떠오른 이유는 무엇일까? 그를 선택한 사람들은 김재철이 자기 손에서 끝을 볼 자신이 없으면 아예 처음부터 잃사지 않는 사람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에게 맡기면 틀림이 없을 것이다”라고 확신했다.
또한 그에게 일을 맡길 사람들은 이미 충분한 명분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김재철이 가진 평소 신념이나 생각 때문이다. 김재철은 늘 지도를 거꾸로 보는 사람이다. 그는 대한민국이 유라시아 반도의 끝자락에 매달려 있다는 통념에 반대한다. 오히려 대한민국을 세계로 얼마든지 뻗어나갈 수 있는, 지정학적으로 대단히 유리한 중심에 위치해 있다는 믿음을 평생 설파해왔다. 그런 신념을 가진 사람에게, 바다와 관련된 엑스포를 유치하라고 하면 달리 반대하지 않을 거라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유치위원장 자리를 제안 받았을 때 그는 7년 동안의 무역협회장을 그만둔 시점이었다. 유치위원장 자리를 제안하는 사람은 김재철이 자리를 물러났기 때문에 다시 한 번 그에게 중책을 맡겨도 되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무역협회장으로 활동한 7년은 그의 사업 측면에서 상당한 공백 기간에 해당한다. 권한을 위임받은 전문경영인들이 아무리 열심히 해주어도 창업자가 직접 진두지휘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게 마련이다. 특히 사세를 확장하는 사업 기회의 포착과 기업 인수 등은 창업자가 직접 지휘해야 하는 일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창업주가 현장에서 손을 떼면 위험을 감수해야 할 의사결정은 전문경영인들이 내리기 힘들다.”
여기서 우리는 기업인이 가능한 한 공직을 멀리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자. 어떤 기업가가 공직을 맡더라도 기존 사업을 운영하는 일은 그렇게 어렵지 않다. 그러나 일단 기업가가 현장을 떠나면 새로운 수입원을 개발하는 일은 어려워진다. 공직을 마치고 돌아올 즈음이면 세상이 많이 변해 있을 수 있다. 이때 기존 사업의 수익 모델이 어려움을 겪는 경우를 종동 목격하게 된다. 아무리 탄탄한 기업이라도 계속해서 새로운 수입원을 만들어내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면 언제 위기가 닥칠지 모르는 일이다. 그래서 기업가들의 공직 진출은 심사숙고 해야 하는 일이며,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기업가에게 공직을 맡기려는 사람들은 그 기업의 앞날은 안중에도 없다. 각자가 추구하는 목적이 다르기 때문이다. 2006년 설날, 여수시장과 몇몇 사람들이 노무현 정부에서 인사수석을 지냈던 정찬용을 찾아온다. 정부가 엑스포 유치를 결정한 지 1년 반이나 지난 시점에서 유치위원장을 선임하지 못한 까닭에 도움을 청하기 위한 자리였다. 정찬용은 김재철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지만 평소에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해서 자신을 찾아온 여수의 관계자들에게 이렇게 조언한다. “빨리 동원그룹 김재철 회장님을 찾아가보세요. 그분이 우리나라에서 바다와 해양에 대해서는 최고의 식견을 갖춘 분일 겁니다.”
얼마 후, 그들은 설득할 수 없었다며 낙담한 채 정찬용을 찾았다. 그래서 정찬용이 다시 나섰다. 이번에도 거절이었는데, 그 이유가 충분히 타당했다. “우리 동원그룹이 금융회사도 만들어 일이 많아졌습니다. 또 내가 무역협회장을 지난 7년간 하면서 회사 일에 전념하지를 못했어요. 이제 바깥일은 그만하고자 합니다.” 그런데도 정찬용은 간곡하게 거듭 설득한다. “회장님, 바다를 주제로 하는 여수엑스포 유치활동을 바다와 해양을 가장 잘 아시는 회장님 말고 누가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나라와 지역의 미래가 달린 문제입니다. 회장님, 도와주십시오.”
자신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정찬용은 인사수석 출신답게 대통령께 상황을 보고하고 설득 전화를 해주십사 요청을 하게 된다. 이후에도 여러 경로로 수차례 위원장을 맡아달라는 요청이 왔지만 그는 거절했다. 한번은 노무현 대통령이 김재철을 부인과 함께 청와대 사저로 초대했다. 그때 난감한 일이 발생하고 마는데, 그날따라 광화문에서 차가 밀려 약속 시간에 늦게 도착하고 말았다. 그런데 대통령 내외가 김재철 부부를 바깥에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이로써 결정권은 대통령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우리가 누군가를 만날 때 약속에 늦으면 상대방에게 결정권을 넘겨주는 것을 뜻한다. 그때를 떠올리며 김재철은 웃으며 말했다.
“그날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거절할 명분을 다 잃고 말았지요. 마치 모든 것이 결정된 것처럼 이야기를 하시는데 ‘못하겠다’고 면전에서 말하기가 힘들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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