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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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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웅 칼럼니스트와 함께하는 인문학으로 본 세상 –윤두서의 자화상
내면의 얼굴을 그린 화가 윤두서 초상화 미완성의 작품일까?

한 올 한 올 살아 움직이는 듯이 한 수염과 탕건 속에 그려진 머리카락은 굉장히 사실적 조선시대의 초상화 대

개 측면을 보고 있다. 이 그림은 똑바로 정면을 응시 마치 도전을 걸 어오는 것 같은 기분

자기의 얼굴을 그림에 있어 조선 후기 문인이며 화가인 윤두서가 그린 자화상처럼 강열하게 그릴 수 있을 까? 생각해본다. 윤두서가 직접 그린 자신의 자화상으로 크기는 가로 20.5, 세로 38.5이다. 누가 한 눈에 봐도 특이한 그림이다. 모자의 윗부분은 잘려나갔고, 몸통은 생략되었다. 자세히 보면 귀도 그려져 있지 않다. 안 그린 부분이 많아서 '그리다 만 그림인가?'라는 생각도 들기도 한다. 그렇지만 미완성이라고 하기에는 한 올 한 올 살아 움직이는 듯이 한 수염과 탕건 속에 그려진 머리카락은 굉장히 사실적이다.주목할 만 한 점은 또 있다. 조선시대의 초상화들은 대개 측면을 보고 있는데, 이 그림은 똑바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마치 도전을 걸어오는 것 같은 기분도 들기도 한다. 이 미스터리한 그림의 주인공이 바로 윤두서 이다.
윤두서는 바로 조선을 대표하는 천재화가이다. 33재 중 한 사람인 공재 윤두서이다. 이 그림은 윤두서가 자기 자신을 그린 자화상이다. 사람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로는 드물게 국보로 지정됐을 뿐만 아니라, 국보로 지정된 초상화 중 유일한 자화상이기도 하다.
공재의 고향 녹우당과 백포 고택 공재 윤두서는 1668년 해남 연동 녹우당에서 태어났다. 대부분 서울에서 살았다. 그가 고향 해남 녹우당에 다시 내려 온 것은 171346세였다. 녹우당이 지금의 당호를 사용한 것은 이 무렵 이라고 볼 수 있다. 공재와 아주 절친하였던 옥동 이서가 '녹우당'이라는 당호를 짓고 써주었다. 공재는 집안의 토지가 많은 해남 백포에 전택을 짓고 녹우당을 오가며 토지를 경영했다. 이곳은 선대로부터 간척을 하여 많은 토지를 확보하고 있는 곳이다. 지금 공재 고택이 고스란히 남아 있으며 고택 뒤에는 공재의 무덤이 고택을 지키고 있다. 공재는 48세에 녹우당에서 생을 마친다. 천재의 삶은 항상 짧다. 300년이 지난 지금 그의 삶을 평가하고 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오래 전 사람들의 가치를 평가받고 증명받기 위해서는 무언가 남아 있어야 한다. 사라진 것은 허공의 바람 같은 것이다. 공재 윤두서와 아들 낙서 윤덕희는 집안 선대의 서책들과 유물들을 수집하고 이를 하나로 잘 꾸며 놓아 지금까지 그 유산들이 남아있게 했다. 지금은 고산 윤선도 유물 전시관으로 되어있다.
 
윤두서의 자화상은 종이에 옅게 채색하여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에서 윤두서는 윗부분을 생략한 탕건을 쓰고 눈은 마치 자신과 대결하듯 앞면을 보고 있으며 두툼한 입술에 수염은 터럭 한올한올까지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다. 화폭의 윗부분에 얼굴이 배치되었는데 아래 길게 늘어져 있는 수염이 얼굴을 위로 떠받치는 듯하다.우리나라의 자화상은 허목의 미수기언이나 김시습의 매월당집을 보면 고려시대에도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18세기에 들어서는 이강좌, 강세황의 작품들이 전해온다. 이런 자화상 가운데 윤두서의 자화상은 표현형식이나 기법에서 특이한 양식을 보이는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된다.
지난 1987년 국보로 지정된 윤두서 자화상은 얼굴 부위에 보이지 않는 귀나 상체 도포의 옷 주름선이 없는 것을 놓고 미완성 작품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그러나 적외선을 통해 보면 뚜렷하게 나타나는 귀나 옷 주름선을 놓고 "그림의 제작기법에서 나타나는 문제다", "그림의 완성 시기가 다르기 때문이다" 등 아직도 그림의 실체에 대한 논란이 지속되고 있어 공재의 자화상은 그림을 통해 가장 주목받는 작품 중에 하나라 할 수 있다. 윤두서 자화상은 그동안 극사실주의 적인 세밀한 그림기법이다. 서양화법을 도입한 묘사방법으로 당시의 화풍에서는 보기 힘든 파격적인 그림의 구도 등으로 인해 혁신적인 그림으로 평가되어 왔다. 이처럼 자화상을 통해 우리나라 회화사에서 강렬하고도 새로운 혁신의 그림세계를 보여준다.
시원하게 바람을 가르며 광활한 세상으로 휘달리고 싶었음인지, 윤두서는 말 그림을 즐겨 그렸고 또 잘 그렸다. 버드나무 밑에 선 백마」 「뒹구는 말, 중국의 유명한 말들을 그린 팔준마도등 훌륭한 말 그림들이 그의 해남 집과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서민을 예술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건 정말 혁명적-진심으로 위했다 국립중앙박물관에는 그의 자화상과 함께 한국 회화사상 손꼽히는 명작으로 평가되는 노승도그리고 심득경 초상화가 있다. 심득경은 윤선도의 외증손이며 윤두서와 절친한 지기로 지냈는데 먼저 죽었다. 윤두서가 그의 초상을 그려서 보내니 그 집안사람들이 본인이 살아 온 것 같아서 모두 울었다고 한다. 그의 그림이 인물의 겉모습을 그리는 데 그치지 않고 내면의 사람됨까지 그려 냈음[傳神寫照]을 말해 주는 일화이다.
조선시대 풍속화가 하면 우리 머리속에 떠오르는 대표 인물이 있다. 바로 김홍도와 신윤복이다. 하지만 윤두서는 이들보다 반세기 가량 앞서서 가장 먼저 서민을 화폭에 담은 풍속화의 선구자였다.
땀 흘려 일하는 서민들의 삶이 아름답게 보이지 않았을 시기이다. 더군다나 윤두서는 명문가 사대부 출신이다. 그런 사람이 서민을 예술의 대상으로 삼았다는 건 정말 혁명적이라는 말로 부족할 정도로 조선 미술사에 한 획을 긋는 일이었다. 그만큼 윤두서가 서민들에게 깊은 관심을 가졌다는 걸 알 수 있다윤두서는 자기 집 노비를 부를 때도 이놈 저놈 하는 일 없이 항상 이름으로 불렀다. 심한 기근이 들었을 때는 염전 사업을 펼쳐 백성 구휼에 앞장서기도 했다. 윤두서가 단순히 서민을 그림의 대상으로만 바라본 게 아니라 진심으로 위했다는 걸 보여주는 부분이다. 우리도 지금의 사회에서 다시 생각해 보고 우리 시대 소외되고 있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눈길을 돌려 바라보아주는 모습이 필요하다.
 
자화상에 좀 더 이야기 해보자. 한국 최고의 초상화로 평가받는 불후의 명작 윤두서의 자화상인 이 그림은 매우 특이하다. 부리부리한 눈매가 무섭기까지 하다, 거울을 보고 그린 듯이 꼼꼼하게 한올한올 사실 적이다.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불타오르는 수염처럼 보인다. 지금 살아있는 사람처럼 넘치는 생동감이면서도 파격적이다. 특히 생략하여 그려진 모습은 보는 이를 섬뜩한 공포로 몰아넣는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있어야 할 두 귀와 목 그리고 상체가 없다는 점이다. 탕건 윗부분이 잘려나간 채 화폭 위쪽에 매달린 얼굴이 매섭게 노려보고 있다. 생각을 해봐도 참 신기하기만 하는 창의적인 발상이다. 대체 이런 그림이 어떻게 나온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윤두서가 일부러 그렇게 그린 것이라고 생각이 되기도 한다. 안목 없는 후대의 어처구니없는 판단으로 가끔씩 엉뚱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그런 이야기는 작품의 예술성을 떨어뜨리지는 못한다.
또 다른 이야기도 있다. 1937년 조선총독부가 펴낸 조선사료집진속에는 놀랍게도 목과 상체가 선명하게 남아있는 윤두서 자화상의 옛 사진이 들어있다. 그 사진 속에서 윤두서는 도포를 입고 있다. 단정하게 여민 옷깃과 정돈되고 완만한 옷 주름, 어질고 기품 있는 얼굴은 현존하는 자화상 실물과는 분위기가 전혀 다르다.
그러면 상반신 윤곽선은 어떻게 감쪽같이 없어진 것일까. 그 비밀의 열쇠는 상체를 그리는데 사용했던 유탄(柳炭) 즉 버드나무 숯인 유탄은 스케치연필에 해당한다. 접착력이 약해 수정하기는 편하지만 대신 잘 지워지는 약점이 있어 조선시대엔 보통 밑그림용으로 사용됐다. 그래서 유탄으로 그린 상체는 지워지고 먹으로 그린 얼굴만 살아남은 것이라는 이야기다. 윤두서가 미처 먹으로 상체의 선을 그리지 않아 작품이 미완성 상태로 후대에 전해오다 관리소홀로 지워진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리고 언제인지 모르지만 미숙한 표구상이 구겨진 작품을 펴고 때를 빼는 과정에서 표면을 심하게 문질러 유탄 자국을 지워버리는 엄청난 사고를 저질렀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우리의 옛 조상들은 초상화든 실제모습이든 신체를 훼손하지 않는다. 초상화 같은 경우는 똑같이 그리는 것을 매우 중요시 여겼다. 특히 신체 중에서 얼굴은 눈, , , 귀는 물론 머리카락까지 온전히 그려야했다. 그것은 화가라면 꼭 지켜야 할 규칙이 있다. 그런데 이 그림은 이상하리만큼 머리 윗부분이 잘린 초상화이다. 윤두서는 왜 규칙을 깨고 독특한 모습으로 자신을 그렸을 까?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고 해두자 다만 윤두서가 한양에서 고향 해남으로 낙향했던 즈음에 <자화상>을 그렸다는 점에서 단서를 찾는 학자도 있다. 탕건을 자른 것은 출세와 명예를 버리고 고향으로 훌훌 떠났던 마음을 보여준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2006국립중앙박물관에서 최첨단 기기를 동원해 정밀 조사한 결과 상반신의 의복 윤곽이 뚜렷하게 드러났다. 게다가 생략된 걸로 여겨진 귀도 붉은 선으로 표현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상반신 의복 윤곽이 보이지 않게 된데에는 후손들이 표구를 잘못해서그렇다는 의견이 설득력이 높다. 1960년대에 말려져 있던 이 그림을 펴서 표구하는 과정에서 그림을 두꺼운 배지에 그냥 붙여버린 탓에 상반신의 의복 윤곽선이 보이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러나 국보라서 함부로 손댈 수도 없는 상황이라 다시 표구를 한다는 건 불가능하고 사진들을 보면서 실물을 감상할 때 상상력으로 결합하는 수밖에는 없을 듯하다.
  
 
(국보 240호인 윤두서 자화상이 과학조사로 일부 비밀이 풀렸다. 맨눈으로 볼 수 없었던 귀(작은 사진)의 묘사와 몸체 표현이 적외선과 X선시, X선 형광분석기 연료분석으로 드러났다. 어떻든 통통한 붉은 얼굴과 형형한 눈빛은 정말 우리를 감탄하게 하고도 남는다. 이 자화상은 특이한 점이 많은 그림이다.)
 
윤효언자사소진찬尹孝彦自寫小眞贊 (윤효언이 스스로 그린 작은 초상화를 칭찬하다)
* ‘효언은 윤두서의 자(
 
이불만육척지신以不滿六尺之身 (6척도 안 되는 몸으로)
유초월사해지지有超越四海之志 (사해를 초월하려는 뜻이 있네)
표장염이안여악단飄長髥而顔如渥丹 (긴 수염 나부끼는 얼굴은 윤택하고 붉구나)
망지자의기위우인검사望之者疑其爲羽人劍士 (그림을 보는 이는 그가 신선이나 검객으로 의심하지만)
이기순순퇴양지풍而其恂恂退讓之風 (그 진실로 물러나고 양보하는 기품은)
개역무괴호독행지군자蓋亦無愧乎篤行之君子 (대체로 인정 많고 성실한 군자로서 또한 부끄럼이 없구나)
여상평지왈풍류사고옥산余嘗評之曰風流似顧玉山 (내가 일찍이 그를 평해 말하기를 풍류는 옥산 고덕희 같고)
절예류조승지絶藝類趙承旨 (빼어난 기예는 승지 조맹부와 같으니)
구욕식기인어천재지하자苟欲識其人於千載之下者 (진실로 천년 후라도 그를 알고자하는 자는)
우부필구제분묵지초사又不必求諸粉墨之肖似 (다시 채색과 먹으로 그린 초상화에서 닮음을 찾을 필요 없으리)
노승도老僧圖 - 석장 짚고 거니는 노승을 사생하다
구부정한 모습의 노승이 긴 지팡이를 짚고 한 손에는 염주를 잡은 채 거닐고 있다. 땅을 지그시 바라다보며 상념에 잠긴 듯 한 노승의 얼굴은 가늘고 섬세한 필선으로 세밀하게 묘사하여 늙고 마른 고승의 깊은 심사가 전해지는 듯하다. 그러나 노승이 입은 거친 질감의 승복은 굵고 빠른 필선으로 대범하게 그려내었다. 특히 화면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지팡이는 거의 하나의 필선으로 굵게 그렸는데, 아랫부분에서는 먹이 마른 듯 비백(飛白)의 효과가 나타나고 있어 화가의 필력과 기량이 보통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노승의 뒤쪽으로 대나무가 있고 오른쪽 지면에 약간의 잡풀이 있는 것을 제외하면 나머지 화면은 거의 여백으로 남겨져 있어 여운을 느끼게 한다.
윤두서는 어릴 적 이후 한양에서 거주하였지만, 늘 해남을 왕래하면서 대갓집 종손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윤두서의 해남 종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는 대흥사라고 하는 고찰(古刹)이 있었고, 윤두서는 유불선(儒佛仙)을 비롯하여 서양학문에 이르기까지 박학(博學)을 추구한 선비로서 승려들과 교분을 나누었다. 윤두서는 그림을 그릴 때 관찰과 사생을 매우 중시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말을 그리기 위하여 말을 기르고, 오랜 관찰하여 그 습성을 숙지한 뒤에 그렸다고 한다. 사람을 그릴 때에도 사생을 중시하였다. 조귀명은 동계집에서 윤두서가 스님을 그릴 때면 늘 성총(性聰, 1631~1700)이라는 스님을 불러다가 직접 앉혀놓고 사생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성총은 백암(栢庵) 성총이란 스님으로 70세에 입적하였는데, 이때 윤두서가 33세였다고 한다. 따라서 윤두서가 젊은 시절에 고승들과 교분을 가지고 있었고, 일찍이 사생을 실천한 것을 알 수 있다. 이 작품에 나타나는 사실감은 바로 이러한 관찰과 사생의 결실이다.
 

정관웅

힐링코칭상담연구소장
시인칼럼니스트
강진고을신문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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