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 출신 법대생의 서울 살이
제가 ‘맨발의 청춘에 하숙생’이었던 시절, 당신의 노래가 저에게 거의 유일한 위안이었습니다.
2018년 8월 25일 페이스북에 올린 가수 최희준 님에 대한 추모 글
1970년 이낙연은 서울대 법대 70학번으로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 광주에 이은 제2의 유학기가 열린 것이다.
대학 신입생이었지만 캠퍼스의 낭만은 꿈도 꿀 수 없었다. 1학년 때는 하숙집을 구하지 않고 입주 가정교사를 하기로 했다. 그러나 1년 못 가 그 집을 나와 학교가 있는 동숭동 근처의 선배 하숙집, 친구 자취방을 전전했다. 아버지에게 하숙비를 기대하기가 어려웠기에 설거지나 이삿짐 나르는 등 궂은일을 도우며 친구 집에 얹혀살았다. 남들이 부러워할 대학의 교복을 입고 배지를 달고 다녔지만, 청춘은 궁색하고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2학년이 된 1971년 박정희 정권이 대학에서 군사교육 과목인 교련을 강화하자 학생들은 교련 철폐 투쟁을 시작했다. 교문 밖에서 쏜 최루탄의 여진이 학교 안까지 엄습했고, 거리에서 불심검문은 다반사였다. 학교에 가는 날보다 쉬는 날이 많았다. 시대는 암울했지만 봄이 되니 꽃이 피었다. 이낙연도 청춘의 가슴에 꽃이 피었다고 했다. 신민당의 대통령 후보로 나온 김대중 선생 때문이었다.
“제 인생에 가장 길게 영향을 미친 사건이라면 역시 DJ와의 만남입니다. 대학 1학년 때 신민당 대선 후보를 선출할 때 DJ가 YS(김영삼)에게 역전승했지요. 1차 투표에서 졌다 2차에서 DJ가 이겼죠. 2학년 때 DJ의 장충동 ㅇ녀설은 정말 황홀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권력자의 선동이라고 느꼈음직한, 사람의 마음을 파고드는 강렬한 음성과 메시지가 있었거든요.” (서울대학교 동창회보 인터뷰 2017.8)
김대중의 연설을 듣기 위해 대학 수업을 빼먹는 것이 전혀 아쉽지 않았고, 김대중을 보는 것이 가장 큰 자랑이었고, 김대중의 연설을 직접 듣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이었다. 그러나 그해 가을 대학가에는 최악의 시련이 닥친다. 박정릐 정권은 10월 서울 전역에 위수령을 내리고 군 병력을 캠퍼스에 투입해 2천 명 가까운 학생들을 연행했다. 12월에는 국가 비상사태를 선언했고, 이듬해엔 유신 쿠데타를 일으켰다. 서울대 법대 동기인 이임성 변호사의 이야기다.
“학교 나간 기억이 많지 않아요. 낙연이나 저나 답답한 시국에 할 수 있는 일은 집회에 나가는 것밖에 없었어요. 휴교령이 내리면 서울에 머물기가 힘들어서 차라리 고향 집에 내려가자며 짐을 쌌는데, 그럴 때 낙연이는 우리 집이 있는 전주에 들려 며칠 지내다가 영광으로 갔어요. 전주 막걸릿집에서 이런저런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나눴지요. 학교에서 수업을 들을 때보다 휴교했을 때 우리는 더 친해졌어요.”
경찰서에 끌려가는 일이 없도록 중간쯤에 서서 집회에 참여했다. 시위 경력이 사법시험 합격에 장애가 될 수 있어서였다. 사법고시 공부를 하긴 했지만 현실을 바꿀 수 없기에 답답했다. 법이 무언가 사회의 정의가 무엇인가? 본질적인 물음을 던질수록 돌아오는 건 절망뿐이었다. 그래도 마음은 넉넉하고 따뜻했다. 서울법대 동기인 학담스님(조계종 전 중앙종회의원)은 이낙연과의 인연을 이렇게 기억한다.
“1971년 대학 2학년 2학기 같이 한방에서 하숙했습니다. 그 시기에 사회는 3선개헌에서 유신체제로 넘어가는 혼란기였고 개인적으로는 갑작스러운 출가로 주변의 가족과 지인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던 시기였습니다. 당시 나는 출가 이후 가족과도 대화가 끊기고 휴교령으로 산사에 머물다가 학업 지속의 문제로 상경해서, 절집 은사와도 소원해진 때였습니다. 승복을 걸친 나와 한방에서 지낸 이낙연은 나에게 벗이 아니라 고립무원의 정신적 상황에서 그늘이고 다리였습니다. 몸이 멀리 있어도 뜻이 같은 자를 동지라 하던가요. 이낙연을 미래 역사의 꿈을 같이할 동지라 생각합니다.”
창신동 언덕빼기에 있던 하숙집을 비롯해 종로 일대가 그가 헐벗은 청춘을 기댔던 동네였다. 효자동, 부암동, 평창동, 삼청동의 독서실 등을 다니며 공부를 게속했다. 그러나 갈수록 학비와 생활비 걱정은 쌓여갔다. 장난처럼 ‘법대가 아니라 밥대를 다닌다’라고 했으나 끼니 챙기기도 쉽지 않았다. 4학년이 되었을 때 그는 자신의 모습을 ‘시신’같았다고 회상했다. 영양실조로 체중이 50킬로그램 아래로 떨어질 정도였다. 대학 졸업식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영장이 날아오자 그는 곧바로 군에 입대했다. 법대 동기 정경택 변호사는 당시 이낙연의 선택이 무척 예외적인 경우였다고 한다.
“낙연이가 군대 간다고 하니까 법대 친구들이 다 놀랐죠. 보통은 사법시험 끝날 때까지는 영장이 나와도 연기했고, 그게 용인이 됐어요. 당시에 연기를 안 하고 군대에 곧바로 가는 건 아주 바보거나 아주 독특한 철학이 있거나 둘 중 하나로 보는 시선이 있었어요. 그런데 그 친구는 ‘영장이 나왔으니 가야지’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이후에 이낙연의 여러 선택을 보면서 이해하게 됐어요. 이 친구는 입대 연기도 꼼수라고 생각했겠구나.”
이낙연은 1974년 2월 육군에 입대, 광주 31사단에서 6주간의 신병훈련을 받게 되었다. 훈련소에서 허기진 시간은 계속되었다. 그러던 중 기이한 인연을 만나게 되는데, 이낙연이 국회의원 때 기고한 한 대목이다.
“어느 훈련병이나 마찬가지였겠지만, 나 역시 광주 31사단 훈련소에서 엄청나게 배가 고팠다. 휴식시간 PX에 가면 다른 훈렵병의 입에 들어가는 빵까지 빼앗아 먹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던 중 어느 날 PX에서 B군을 만났다. 고등학교 대학교 친구인 그는 빵을 사들고 나오는 참이었다. 그의 입대는 나보다 2주일이나 빨랐다. 낯설고 고생스러운 훈련소에서 친한 친구를 만나니 반가움에 가슴이 다 떨렸다.
그는 “너 배고프지?”하더니 자기가 먹으려던 빵을 모두 나에게 주고 가버렸다. 힘든 훈련을 나보다 2주일이나 더 받았으니, 배고픔을 따져 보면 그가 훨씬 더 하고도 남았다. “괜찮다”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는 나에게 빵을 안겨주고는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 배고픈 훈련병 시절 친구가 전해준 그날의 따뜻한 우정은 늘 잊혀지지 않는다. 그 빵을 사양하지 못하고 받아 먹었던 미안한 마음과 함께……. (월간조선 기획특집 ‘나의 병영시절’ 기고문 . 2006년 11월)
빵을 건네준 그는 바로 함께 하숙했던 학담 스님이었다. 이후 카투사로 배속돼 서울 용산 미8군 제21 수송 중대에서 행정병으로 근무했다. 6개월 쯤 지나자 제법 영어가 늘었고, 살이 붙었다. 이낙연이 회고하길 십대 이후 상체를 벗었을 때 갈비뼈가 보이지 않은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고 한다, 휴가 때 시골집에서 아버지와 나눈 대화이다.
“밥은 뭘 주디야?”
“예. 쇠고기도 나오고 돼지고기도 나오고, 닭도 한 마리씩 나오고요.”
“미국은 참말로 부잔갑다. 어떻게 닭을 끼니마다 한 마리씩 먹는다냐?” ⌜어머니의 추억⌟ 37쪽.
1976년 9월. 군 복무를 마치고 이낙연은 병장으로 제대했다. 억울한 사람들을 돕는 변호사가 되고 싶다는 꿈은 여전했지만 현실은 암담했다. 막막해하는 이낙연에게 한 친구가 후원을 할테니 공부하라고 했지만, 마음이 불편했다. 친구에게 신세지는 게 괴로웠고 동생이 다섯이나 있는데 취직을 않고 공부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고민 끝에 이낙연은 친구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하며 7개월 만에 변호사의 꿈을 접었다.
이후에 마음의 상처는 제법 깊었던가 보다. 사법고시와 행정고시에 한 차례씩 도전했지만 낙방했는데, 이후로 그는 시험에 떨어지는 꿈을 20년 넘게 꾸었다고 한다.
이 시절을 돌아보며 이낙연은 총리 인사청문회에서 “나름으로는 악전고투하면서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하지만 지나고 보면 어디 내놓을만한 자랑스러운 궤적은 별로 없는 것 같고 그런 전체를 누추하다고 느꼈습니다. 문자 그대로 남루한 인생이었습니다.”라고 회고했다. 원로가수 최희준이 향년 82세로 별세하자 아낙연 총리가 SNS에 남긴 추모 글은 하숙생의 가사처럼 ‘눈물도 한숨도 나 홀로 씹어 삼키며 밤거리의 뒷골목을 누비고 다녔던’ 청춘에 대한 송가였다. 글 이제이 <다름 호에 계속>
다음기사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