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전에 귀하를 뵈온 적은 없으나 높으신 이름을 오래전에 들었기에 흠앙하는 마음이 더욱 깊습니다. 봄이 한창이어서 이미 따사로운데 엎드려 바라옵건대 대사의 존체에 만복이 깃드소서.”
9세기에 씌어진 『입당구법순례행기』에서 저자인 엔닌 스님이 장보고에 올린 편지의 한 대목이다. 당시 일본인이 당나라를 방문하기 위해서는 장보고의 해상 루트를 이용해야 하고 신라인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특히 이 책에는 엔닌 스님이 당나라에 체류할 수 있게 된 데는 장보고를 비롯한 신라인의 도움이 있었다고 기록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9년 반 만의 귀국길에도 신라인의 배와 그들의 길 안내를 통해 완도를 경유해 일본에 도착했다고 증언한다. 미국 하버드 대학의 라이샤워 교수는 장보고를 ‘해양 상업제국의 무역왕자’ 또는 ‘해외 조계지를 지배한 총독’으로 평가했다.
장보고, 시대를 앞섰던 사업가
“우리 역사에서도 비즈니스맨으로서 이렇게 훌륭한 분이 계셨구나”
김재철이 이런 생각을 갖게 된 계기는 1990년 전후였다. 국내 언론에 장보고 관련 기사가 집중적으로 실릴 때부터이다. 장보고에 대한 김재철의 생각은 일찍이 장보고를 알리기 시작한 김성훈(중앙대 교수, 전 농림부 장관)이 발표한 연구 내용과 맥을 같이한다.
“장보고의 청해진 조직은 병부(군사체제). 민주(무역체제), 재당･재일 신라인 집단거주지의 자치체제 등 세 개의 조직으로 구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오늘날의 이른자 ‘군산복합체 종합상사’의 성격이 짙다. (…) 장보고를 중심으로 하는 당시의 청해진 세력은 단순히 한･중･일을 연결하는 국제 삼각무역에 그치지 않고, 중국 내의 남북무역을 담당하고 나아가 저장성, 푸젠성 및 양쯔강 일대에 진출해 있던 페르시아 및 동남아시아 상인들과의 상거래도 주도한 것으로 보인다. 장보고 상단의 국제통상 지식과 정보력은 당시로서는 상상을 뛰어넘는 우수한 수준이었다. 그리고 단순히 무역 업무에만 종사한 것이 아니라 정부 무역의 대행, 3국 정부 공식사절 안내, 여객 운송, 선박 건조와 수리, 한･중･일 통역 및 선원 제공, 종교문화 지원 등 각종 서비스 및 문화사업까지 겸하여 수행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해상왕 장보고에 대한 재조명 및 평가사업은 1998년 해양수산부 내에 장보고 기획단이 설립되면서 본격화된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장보고의 복원 사업도 해양수산부라는 독립 부처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해양수산부는 1999년 10월 학계 및 관련 업계 인사 100명으로 구성된 ‘해상왕장보고재조명 평가사업 추진위원회’를 구성하는데, 이때 김재철은 위원장을 맡게 된다. 이후 많은 해양인들의 지원과 관심 속에 재단법인 해상왕장보고기념사업회가 1999년 11월 설립되었다. 생전에 장보고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던 고 이병철 회장의 유지에 따라 삼성그룹이 10억원을 기부함으로써 재단 설립에 종잣돈이 되었다.
해상왕장보고기념사업회의 발족
해상왕장보고기념사업회의 초대 이사장은 오랫동안 장보고 연구를 주도해온 김문경이 맡았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김재철이 자리를 맡도록 강력하게 요구한다. 이유는 학자들의 노력만으로 장보고 복원사업을 꾸려나가기가 쉽지 않음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이 장보고 연구를 오랫동안 해왔지만 추진력을 가진 경영자가 나서지 않는다면 효과가 없으리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의 권유에 따라 1999년 12월에 김재철이 제2대 이사장에 취임하고, 그 이후 11년간 사업회를 이끈다.
학계에서 장보고 연구를 시작한 사람은 1935년 무렵 한국 사학계의 태두 김상기였다. 이후 라이샤워와 김문경 등이 장보고 연구를 추진했고, 1989년 11월에는 ‘장보고해양경영사연구회’가 발족되어 활동했지만 학계를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학계 원로들을 중심으로 김재철이 추진하여 장보고의 현대적 의미를 우리 사회가 주목하도록 만들자는 공감대가 형성되었다. 김재철은 어떤 시대라도 반듯한 시대정신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런 시대정신을 역사적인 인물이나 그 사례에서 배울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귀한 일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는 이 시대가 장보고라는 역사적 인물을 부활시켜야 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보았다. 그가 장보고에 부여하는 의미는 이렇다.
“장보고는 당시 새로운 국제무역 질서의 태동에 능동적으로 참가하여 동북아 경제 질서를 주체적으로 형성했으며 동아시아 물류 네트워크를 완성했고, 이를 동남아 인도 항로와 연결해 세계 최초로 동서의 무역망을 하나로 묶는 데 성공했다. 뿐만 아니라 고향 강진에서 생산된 고려청자를 일본, 이슬람 등에 고가로 수출하는 등 무역의 고부가가치화를 추진했다. 그는 장보고의 이러한 업적을 통해 우리나라가 장보고의 정신을 벤치마킹할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때마침 김재철은 한국무역협회 회장직을 맡기 시작했다. 무역입국을 통한 선진국 진입이란 협회의 지향점과 역사 속의 장보고는 우리에게 역할 모델을 제시하는 귀한 자산이었다. 이렇게 해서 이듬해 1999년 3월, 해상왕장보도기념사업회가 한국무역센터에 재단 사무처를 두고 본격적인 사업에 들어간다.
김재철은 이사장에 취임한 뒤 학술연구를 체계적으로 진행하기 위해 ‘해상왕장보도연구회’를 2000년 4월 24일에 발족시킨다. 본격적으로 ‘장보고학’을 정립하기 위해 나선 것이다. 연구회는 학술사업도 활발히 추진하는데, 이는 평소 지적인 토대의 중요성을 강조한 김재철의 철학을 반영한 결정이었다. 그는 대중화 작업 이전에 학술 작업이 선행되어야 한다도 생각했다. 2001년부터 매년 학술지원사업의 일환으로 장보고 연구과제를 공모했고, 장보고 연구전문가 그룹을 지원했다. 이 결과 초기 3~4년 동안 여러 권의 자료집이 집대성되었다. 『7~8세기 한･중･일교역연구문헌 목록 및 자료집』,『해상왕 장보고의 국제무역활동과 물류』등은 초기의 대표적인 연구물이다. 또한 구비설화 연구에서부터 해양신앙, 도서연구, 이슬람과의 교역 연구, 해양경영의 전략, 유가철학과 무역, 불교신앙, 차문화 등 폭넓은 주제의 연구가 이루어졌다. 10년간 단행본 총 42종 63권을 펴냈고, 판매용으로 17종 25권을 발간했다.
소설과 드라마로 장보고를 널리 알리다
해상왕장보고기념사업회는 한 축으로는 학술작업을 통해 장기간에 걸친 장보고학의 토대를 구축하고, 다른 한 축으로는 일반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기 위해 활동했다. 우리 역사에도 이런 위인이 있었고, 동북아의 중심국가로 발전하는 데 장보고의 삶을 배워야 한다는 사실을 대중의 마음속에 심을 필요가 있었다. 장보고를 국민에게 알리는 일에는 또 다른 일화가 있다. 한번은 김대중 대통력이 조정제(해양수산부 장관, 재임 1997년 8월 7일~1998년 3월 2일)에게 김재철을 청와대로 부르라했다.
대통령이 말했다. “김 회장, 요즘 ｢왕건｣이 인기를 끌고 있는데 장보고를 드라마로 만들어보면 어떻소?” 김재철은 대답했다. “당장 드라마를 만드는 것은 어렵습니다. 드라마는 계속 인기를 유지해야 하는데, 거기에 초점을 맞추다 보면 자칫 사실로서의 역사가 훼손될 수 있습니다. 좀 더 준비가 된 뒤에 하시는 것이 어떻습니까?” 그러자 대통령은 “그러면 그렇게 해보시오”라고 했다. 나오는 길에 조정제 장관이 놀란 듯 그에게 말했다. “김 회장은 대통령 앞에서 ‘안 됩니다’라고 말하면 어떻게 합니까?” 대통령 앞에서, 사업가라면 누구나 “그렇게 한번 해보겠습니다”라고 답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김재철은 상대방이 누가 되었든 일의 선후를 따진 뒤 합리적인 결론을 내리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었다.
청와대를 나오면서 김재철은 허준을 소재로 한 드라마를 떠올렸다. 그래서 꼼꼼히 조사한 끝에 소설가 최인호를 적임자라고 생각해 그와 접촉한다. 오래 검토를 한 뒤, 최인호가 소설을 맡게 되고, 첫 만남 이후 2~3년이 지나서야 소설이 나온다. 이후 최인호는 2000년 7월부터 2년에 걸쳐 중앙일보에 ‘해신’이라는 제목으로 장보고의 일대기를 그린 소설을 연재한다. 그리고 2003년 1월, KBS 창립 30주년 기념특집 5부작 다큐멘터리 ｢해신｣이 방영된다. 다큐멘터리는 5퍼센트대의 시청률을 기록하기가 어려운데 놀랄 정도로 인기를 끌게 된다. 이를 바탕으로 총 51부작(2004. 11. 24~2005.5.28) 드라마가 KBS 2TV에서 방영된다. 한번은 김재철 회장의 사저를 방문한 적이 있는데, “내가 특별히 귀하게 여기는 물건이 하나 있다”면서 보여준 것이 있다. 드라마 ｢해신｣에 출연했던 탤런트 최수종, 채시라, 송일국 등과 연출을 맡았던 강일수, 강병택 등이 정성을 모아서 이름과 사인을 새긴 감사패였다. 일반적인 감사패와 달리 제작진과 출연진들이 마음과 뜻을 담은 문장이 가슴에 와 닿았다.
｢해신｣을 제작할 때도 여러 가지 에피소드가 있었다. 당연히 장보고의 활동무대였던 완도에 세트장이 들어서야 하는데, 처음에는 쉽지 않았다. 김재철이 나서서 제작사에게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도 제작진은 먼 완도까지 내려가기보다는 KBS가 시설을 소유하고 있는 변산반도를 고집했다. 그는 제작진에게 “한번 정도는 완도군의 현지를 찾아가봐야 하지 않겠는가?”라고 설득하는 한편 완도 군수에게 이렇게 당부한다. “내려보내는 것은 내가 책임을 지겠소. 설득하는 일은 당신이 맡아주시오.”
완도군수는 기발한 아이디어를 낸다. 제작진이 저녁식사를 하는 자리에 완도군의 나이든 어른들 수십 명이 갓과 한복으로 의관을 정제하고 갑자기 나타났다. 그리고 젊은 제작진 앞에서 일제히 큰절을 올렸다. 놀란 제작진들은 엉거주춤하며 바로 그 자리에서 이렇게 약속하고 말았다. “어르신들 이렇게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들이 완도군에 내려와서 촬영하겠습니다.” 지금 완도군에는 청해진 세트장과 신라방 세트장이 있다. 완도읍 대신리 바닷가에 위치한 청해진 세트장은 영화 ｢명랑｣의 촬영장으로도 사용되었다. 그만큼 지역의 관광문화 자원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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