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자의 치열한 취재기
저는 20대 청년기자 시절에 “논평은 자유다. 그러나 사실은 신성하다”라는 불멸의 격언에 매료됐고, 지금도 그것을 신봉하고 있습니다.
2012년 11월 13일 한국언론진흥재단 저널리즘 콘퍼린스 축사
1979년 10월, 이십대 끝자락에 이낙연은 동아일보 기자가 되었다. 변호사의 꿈을 접고 돈을 벌기 위해 잡은 첫 직장은 투자신탁회사였다. 돈은 벌고 있었지만 마음은 헛헛했다. 투자신탁에 대해 설명해도 친구들은 만날 때마다 다시 물었다. 자존심이 상했다. 그래서 선택한 직장이 동아일보였다.
당시 기자는 시대 개척의 최전선에 나선다는 자부심이 컸다. 인문계 대학생들이 선망하는 직업 중 하나가 언론인이었다. 더욱이 동아일보에는 걸출한 인재들이 많았다. 일제 강점기 때 심훈, 채만식, 현진건, 홍명희 같은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들이 동아일보 출신이었다. 독재정권의 시대에 동아일보 기자들은 권력의 감시자로 정권에 정면으로 맞섰다. 법대 동기인 정경택 변호사는 친구 이낙연의 선택에 그런 것들이 영향을 줬으리라 짐작한다.
“한참 피가 끓을 때 아닙니까. 처음에 법대 올 때는 사법시험 돼서 자기 나름대로 정의구현 하는 데 일조를 해보겠다고 온 거잖아요. 그런데 학교에서 배우는 법은 현실을 바꾸는 데 한계가 있어요. 사시 통과해도 정의 실현은 너무 멀고 앞날도 암울하고 그랬죠. 전 이 친구가 사회 정의구현에 사법으로 가는 것보다 언론 쪽으로 가는 게 맞겠다고 생각한 게 아닌가 싶어요.”
기자가 되어 처음으로 출입한 곳은 총리실이었다. 총리실과 통일부 문공부 총무처를 포함하는 ‘중앙청’을 출입하던 그때, 10.26이라는 전대미문의 사건이 터졌다. 전화가 없는 종암동 누나 집에 얹혀살던 이낙연에게 연락이 닿을 리 없었다. 출근해 보니 다른 기자가 쓴 호외가 나와 있었다.
기나긴 유신 독재가 막을 내리고, ‘서울의 봄’은 왔지만 현실은 암담했다. 새내기 기자에게는 격동의 나날이었다. 1979년 겨울의 기억 한 토막이다.
1979년 12월 12일 해 질 녘 여관에 들었다. 국무총리공관 정문 앞 삼청여관 2층(지금은 카페). 대통령권한대행 최규하 총리의 내각 구성을 취재해야 했다. 나는 총리공관을 드나드는 차량 번호라도 파악하고 싶었다. 갑자기 소대 규모의 군인들이 총리공관 정문을 에워쌌다. 나는 여관 밖으로 나가 현장 지휘관에게 사유를 물었다. 소령은 “훈련 중입니다. 들어가세요.”하고 대답했다. 정치부 데스크에 전화로 보고했다. 남중구 차장은 “여기도 들어왔어요. 철수하세요.”라고 하셨다. 내가 겪은 12.12였다. (동아일보 <나와 동아일보> 2017.12.12.)
권력을 잡은 전두환 신군부는 이듬해 언론 통폐합을 실시해 재갈을 물리며, 1.000명이 넘는 언론인을 해직했다. 이 시절에 대해 이낙연은 훗날 “제가 입사 2년차일 때 언론 통폐합이 이루어졌습니다. 저희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었습니다. 그저 밤마다 만나면 맥주, 소주, 막걸리를 뒤섞어 마시면서 그 이름을 ”통폐합주“라고 불렀던 기억이 새롭습니다.”라고 회고했다. 인사청문회에서는 “신군부에 의한 언론인 해직이 공교롭게도 저의 한 기수 산배들까지가 하한선이었습니다. 산 자의 부채감 같은 게 평생 따라다녔습니다.”라며 해직된 선밷,f에 대한 마음의 빚을 토로했다. 신군부의 홍보성 기사를 쓴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물음에 “떳떳하지는 않습니다. 부끄럽습니다.”라고 고백했다.
기자로 치열하게 살았던 21년은 그 부채감과 부끄러움에서 벗어나려는 사투의 과정이었는지 모른다. 정치부 기자로 그는 대한민국 역사의 굵직굵직한 사건을 보도했다. 1985년 분단 40년 만에 열린 이산가족 상봉의 현장에 있었고, 6.29선언 이후에는 국회에 출입하면서 제헌 이래 최초의 합의 개헌 과정을 취재했다. 1987년 6월 항쟁 때는 광장에서 최루탄을 마시며 격동의 현장을 오갔다.
기자 이낙연의 황금기는 1987년부터였다. 민주화 투쟁 이후 직전제 개헌에 따라 치러진 대선에는 노태우 민정당 대표가 여당 후보로, 김영삼, 김대중 후보가 야권에서 출마했다. 이낙연은 그해 가을부터 평화민주당 김대중 대통령 후보의 전담 기자가 됐다. 눈비 맞아가며 동트기 전부터 동교동의 DJ 자택 앞을 지켰다. 당시 중앙일보 정치부 기자였던 고도원 아침편지문화재단 이사장은 이 시절을 이렇게 기억한다.
“하루를 이낙연 기자와 함께 시작했어요. 6시나 7시 딤대중 대통령과 당 사무총장, 장영달 전 의원, 기자로는 저와 이낙연 기자가 함께 모여 식사하면서 보고도 했습니다. 그렇게 식사가 끝나면 언론에서 소위 ‘야마’라고 부르는 야당 총재가 이야기한 핵심 내용을 잘 잡아서 회사에 보고했어요. 그 내용에 따라 기자들이 당으로 가거나 다른 곳으로 취재를 나가곤 했지요.”
석간신문이 ‘정치 아젠다’를 이끌던 시대였다. 정치 가십이라는 한 줄 짜리 논평은 파급력이 대단했다. 전화로 기사를 부르던 때였는데, 고도원 이사장은 그 한 줄 요약에 하루도 모자란 때가 많았다고 한다, 그럴 때 멘토로 삼은 사람이 매일 만나는 이낙연 기자였다.
“동아일보에 난 이낙연 기자가 쓴 가십을 오려서 수첩에 붙여놓고 외우다시피 했어요. 저는 잡지 기자 출신이라 긴 글이 능했지만 한마디로 함축하는 건 쉽지 않았거든요. 사회부 출입을 했지만 정치부 출입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거든요. 그때 이낙연 기자의 정치부 출입은 경이로웠습니다. 이낙연은 정치부 경험도 수년이 쌓여 있었고, 워낙 이 분야에 영민한 감각을 가지 기자였습니다.”
기자 이낙연이 복합적인 상황을 한 줄로 함축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취재하는 현장을 온전히 장악하려는 노력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엄격했고, 팩트로 대결하는 원칙주의자였다.20대 청년기자 시절을 돌이키며 “<가디언>지 편집장 찰스 스콧의 ‘논평은 자유다. 그러나 사실은 신성하다’라는 불멸의 격언에 매료되었고, 지금도 그것을 신봉하고 있다.”라고 고백한 적도 있다. 그게 기자의 본분이라 여겼다. 동아일보 선배인 민병욱 언론진흥재단 이사장은 정치부에 들어갔을 때의 일을 떠올린다.
“사회부에 있던 내가 정치부로 가니까 그동안 자기가 습득한 일종의 취재 비결을 나눠주려는 거예요. 선배가 사회부에서 시경캡(사건기자를 총괄하는 사건팀장)까지 했지만, 정치부는 조금 문화가 다르니까 말씀드린다 하면서 야당 취재할 때 방법이나 팩트 체크 알려주고, 주요 정치인을 소개해 주고 했어요. 정치인 말에 대해 이중으로 사실 관계 확인하고 마지막은 총재인 DJ에게 확인해야 한다. 그럴 수 있으려면 총재랑 언제든지 만나고 통화할 수 ㅇ;ㅆ어야 한다는 얘기였어요. 부장이 알려줘야 할 것을 후배 이낙연이 알려준 거죠. 이낙연은 ‘선배 후배’에요. 후배지만 정치부의 선배에요.”
민병욱 이사장은 끝까지 팩트 찾기에 치열했고, 확인에 확인을 거듭했던 후배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이낙연과 다른 기자를 비교한다면 이렇게 얘기할 수 있어요. 다른 사람은 2줄 분량의 이야기를 듣고 10줄 쓰는데, 이낙연은 10줄을 듣고 3줄을 쓴다.” 후배인 임채청 동아일보 대표이사 부사장은 그를 “머리카락이 들어 있는 청국장은 아무렇지 않게 먹어도 군더더기가 들어 있는 글은 용납하지 못하는” 선배로 평했다. 글에 대한 엄격한 태도를 함축한 표현이다.
이낙연이란 이름은 기사의 질을 보증했다. 언론계 출신의 한 문화 운동가는 문화부장관과 만난 자리에서 자신이 만든 책자를 건넸는데, 처음엔 의례적으로 받던 장관이 책자를 들추다가 “이낙연이가 여기 글을 썼네. 내가 잘 읽어볼게.”하면서 반가워하더라는 일화도 전했다.
기자 이낙연은 치열하게 썼고, 취재대상에 몰입했다. 매일 저녁 이어지는 술과 하루 세 갑의 담배 연기에 삼사십대가 지나갔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열병에 수차례 입원을 했다. 이발을 하러 갔는데 거울을 봤더니 입이 돌아가 있어서 치료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렇게 동아읿보 기자로 21년을 살았다. 스물여덟부터 마흔아홉까지의 시간을 그는 “내가 동아일보 기자가 된 것은 우연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행운이었다.”고 압축했다. 그리고 <나와 동앙리보>라는 제목의 기고문에서 다음의 네 가지를 배웠다고 정리했다.
첫째, 진실을 알기는 몹시 어렵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전두환 장부의 금융실명제 연기처럼 굵은 특종을 곧잘 했다. 그러나 공천 탈락 예상자를 잘못 보도해 여러 정치인들께 상처를, 유권자들께 혼란을 드렸다. 다른 오보도 적지 않았다. 특종보다 오보가 나에게 더 깊은 교훈을 남겼다. 지금도 나는 진실에 신중하다.
둘째, 어느 경우에나 공정해야 한다는 것을 철칙으로 여겼다. 나는 국회의원에게 폭행을 당했다. 내 기사가 싫었던 의원은 의사당 안에서 나에게 주먹질을 했다. 나는 그것을 세상에 알리지 않았다. 그 대신 동료 기자에게 조용히 부탁했다. “앞으로 그 의원 기사는 자네가 써주게. 나는 공정할 자신이 없네.” 나는 공정을 내 브랜드로 살고 싶어 한다.
셋째, 죽을 때까지 공부해야 한다는 것을 터득했다. 인생과 자연의 비밀은 너무 많고, 세상의 변화는 너무 빠르기 때문이다. 지금도 나는 일주일에 하루는 책을 읽으려고 노력한다.
언젠가 이낙연은 해외 순방 중 “내 심장은 정치인”이라는 말을 꺼낸 적이 있다. 이 말은 수정되어야 한다. 내가 봤을 때 이낙연의 심장은 기자에 있다. 기자를 할 때가 가장 젊었을 때였기 때문에 하는 말이 아니다. 오랜 시간 기자를 해서도 아니다. 세상을 탐구하여 끝까지 묻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노력은 지자 정신의 발현이다. 그의 정체성은 기자에 있다. 그런데 기자 정신과 정치인의 정신은 절묘하게 맞닿은 데가 있다. 세상의 실체를 정확히 포착하는 것에서 그 임무가 시작되니 말이다.
글 이제이 <다름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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