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낙연 외교법
우리는 사과 속에 씨앗이 몇 개 들어 있는지를 압니다. 그러나 그 씨앗 속에 사과가 몇 개 들어 있는지는 모릅니다. 우리는 1976년 에콰도르가 수입했던 현대자동차가 6대였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그 여섯 대가 얼마나 커질지를 그 당시에는 몰랐습니다. 그것이 커져서 이제까지 에콰도르에서 생산된 현대차와 기아차만도 23만 4천 대에 이릅니다. 그런 바탕 위에서 이번엔 엘후리 그룹은 ‘그랜드 아이텐’을 연간 4천 대 생산으로 출발하려 하고 있습니다. 이것 또한 앞으로 얼마나 커질지 오늘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2019년 5월 7일 에콰도르 현대 자동차 생산 기념식 축사>
이낙연 총리는 2019년 5월, 지구 한 바퀴를 도는 순방길에 올랐다. 쿠웨이트부터 시작해 남미와 북미까지를 돌고 오는 9박 10일간의 긴 여정이었다.
남미는 물리적 거리도 거리지만 정서적 거리도 그만큼이나 먼 곳이다. 이때 총리는 순방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식견으로 그곳 사람들의 마음을 열어냈다. 에콰도르에서는 한국이 만든 최초의 승용차 ‘포니’를 고리로 대화를 끌어갔다. 이 총리는 현지에 도착해 그 구매자 중 한 사람이 부통령의 어머니인 것을 알게 됐고, 그 사연을 바로 연설에 담아 냈다. 그리고 사과 씨가 나무로 자라 몇 개의 사과를 열매 맺을지 모른다는 비유를 절묘하게 얹어 앞으로 양국의 협력이 확대되길 소망했다. 총리의 연설로 현장의 분위기는 달아올랐다.
이 총리는 해외 순방 연설에 엄청나게 공을 들였다. 현지에서 새로운 무언가를 찾아서 반영할 것을 요구했다. 출발 전에 준비해 가는 순방 연설문은 계속 수정돼 절반 이상이 바뀌었다. 순방국에서 연설팀은 특별 대기조였다. 숙소는 이 총리의 가장 가까운 곳에 배치됐고, 숙소에는 팀을 위한 컴퓨터가 따로 놓였다. 총리의 동선에 따라다니며 방문한 곳, 만난 사람, 현지에서 들은 이야기나 그 나라의 상황을 수시로 업데이트해 채워 넣었다. 현지 음식은 꿈도 못 꾸고 컵라면으로 때우거나 그도 먹지 못한 채 총리의 호출을 기다리며 쪽잠을 자야 했다. 총리가 치열한 만큼 그 정도는 보조를 맞춰야 하지 않겠는가.
문재인 대통령은 총리의 외교 행보를 적극적으로 독려했고, 대통령 전용기인 공군 1호기를 총리의 해외 순방에 내주었다. 투톱의 한 축을 맡은 이 총리는 취임 동안 총 12번의 해외 순방을 통해 25개국을 방문했다. 특유의 친화적인 화법으로 순방 국가마다 친구를 만들었고 외교 지평을 넓혔다.
2017년 10월 22일 ‘평창동계올림픽 성화 채화식’ 참석을 위해 그리스와 불가리아를 이어 방문하는 일정으로 이 총리는 첫 순방길에 나섰다. 작은 것을 연결해 인연을 만들어내는 이 총리의 능력은 외교 무대에서 빛났다. 순방 일정을 함께해 온 추종연 전 외교보좌관의 말이다.
“첫 순방 때 불가리아의 보리소프 총리가 처음에는 좀 고압적이었어요. 그런데 회담 후에는 반전이 되었죠. 이 과정이 극적이었는데요. 30분 정도의 회담을 이 총리는 하나의 퍼포먼스처럼 만들었어요. 이 총리는 외교부에서 주는 자료를 자기 식으로 소화하고 편집해서 얘기해요. 역사, 철학, 예술 등 본인의 폭넓은 지식을 적재적소에 펼치다가 유머까지 더하고, 핵심 사항을 꼭 짚고 나서 마무리합니다. 그렇게 회담 마치고, 오찬까지 하고 나서 불가리아 총리는 이 총리와 형제처럼 포옹하고 헤어졌어요. 회담 때 배석했던 외교부 직원들이 모두 놀랐습니다. 외교는 한마디로 상대방 마음을 사는 것인데, 이 총리는 이후 모든 순방국에서 그걸 보여줬어요.”
이 총리는 언어와 문화 장벽을 넘나드는 친화력을 보였다. 부리질 상파울루 시장에게는 “축구만 빼고 모두 같이하고 싶다.”라는 너스레로 하바탕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고, 콜롬비아에서는 한국 사람과 콜롬비아 국민이 모두 좋아하는 커피 얘기를 꺼내며 즉석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선호하는 원두 배합법 ‘문 블렌딩’응 만들어 선물했다.
지도자의 순방은 ‘경제 외교’에 초점이 맞춰질 때가 많다. 해외에서 활동하는 기업들의 활동을 적극적으로 독려하고 지원하는 것이다. 해외 순방에 동행했던 한 기자는 이 총리가 경제 외교를 위해 끝까지 애썼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고 했다.
“이 총리는 우리 기업들이 수주하려는 프로젝트를 모두 파악하고 얘기했어요. 쿠웨이트에선가는 항만과 석유화학단지, 발전소 같은 인프라가 10개 정도 되었는데, 그걸 지명까지 구체적으로 거명하며 얘기하니까 상대국 사람들은 어떻게 그걸 다 알고 있나 깜짝 놀라는 표정이었어요. 이런 것들이 기업 수주에 영향을 미치게 되지요.”
쿠웨이트의 뉴자흐라 병원 서울대 위탁운영과 에틸렌공장의 미국 진출을 도왔다. 건설 인프라 분야에서는 카타르에서 198억 달러 규모의 건설 수주, 도미니카 공화국에서 14억 달러 규모의 액화천연가스발전소 건설 수주를 지원했다. 이렇게 총리의 적극적인 외교 활동을 보면서 국무총리실 배재정 전 비서실장은 행정 내부에서의 경험과 함께 외교에 대해 많은 공부를 하게 됐다고 회고했다.
“외교 분야에서 이낙연 총리님이 열심히 활동했기 때문에 순방을 수행하면서 다른 나라에서 우리나라 위상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온몸으로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외교란 어떻게 진행되는가 이런 것을 배울 수 있었던 것은 소중한 공부의 기회였다고 생각합니다.”
세계 속에 대한민국의 위상은 50년 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아졌다. 신남방 정책 등으로 외교 무대도 넓어졌다. 추종연 전 외교보좌관은 이낙연 총리가 ‘총리외교’란 분야를 새로 만들며 대한민국 외교의 역사에 기여했다고 말한다.
“이 총리가 외교에 적극적이라서 외교부 직원들은 무척 좋아했어요. 외교가 쌍방이 주고받는 상호주의가 돼야 하는데, 지금까지는 저쪽에서 오는 일방주의였어요. 외교의 영역이 넓어졌지만 대통령 일정만으로 모든 손님들을 만나기는 일정 잡기가 힘들었는데 이 총리 순방 외에도 국내로 오는 외빈들을 거의 다 만났어요. 그러니까 몇 십 년 묵은 숙제를 한 셈이죠.”
이 총리가 순방을 간 곳은 우리나라가 도움을 줘야 하는 나라들이 대부분이었다. 총리는 이런 나라의 지도자들과 대화할 때 민감하게 말을 살폈다. 연설에도 절대 시혜를 베풀 듯 써서는 안 된다고 당부했다. 유숙현 통역관은 이 총리의 그런 점이 마음 깊게 남았다고 한다.
“우리나라가 반세기 만에 받던 나라에서 이제는 주는 나라로 변한 거잖아요. 작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나라를 가거나 거기에서 오신 분들을 만나면, 대한민국도 예전에 못 살고 힘들었다고 하면서 당신이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꼭 얘기합니다. 이 총리는 우리가 도와준다고 하면 상대국 사람들이 마음 상하고, 거북해하지 않을까 세심하게 신경 썼어요. 겸손하게 깍듯하게 예의를 갖춰서 대하니까 외국분들이 인상 깊게 받아들이는 느낌이었어요.”
<글 이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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