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진만햇발
내 기억속의 김경순씨
김현임(수필가·모란촌문학동인회원)
언제던가. 윤영수의 소설, ‘착한 사람 문성현’의 후유증을 오래 앓았다. 제 다리로는 한 발짝 걸을 수 없는 육체적 장애를 가졌으나 주변사람들 모두에게 한없이 선량하던 문성현씨, 반면 겉으론 멀쩡하나 타인의 불행을 이용해 제 이득 챙기기에 연연한, 정신적으론 치명적 장애를 가진 자들이 그에게 가하던 횡포라니! 내 가슴을 얼얼하게 했던 이 소설뿐인가. 인명(人名)이 그대로 제명(題名)이 된 글은 적지 않다. 하지만 다른 사람을 그리는 글엔 소질 없는 나다. 따져보면 그동안 애면글면, 먹는 밥그릇도 공유할 만큼 정을 주던 강아지들, 그러니까 이름도 헤아리기 힘들만큼 수효 많던 수십 마리의 강아지에 관한 글도 겨우 두어 편.
일어나지 않은 어떤 일을 예측하는 것은 수집한 데이터의 양으로 그 정확도가 측정된단다. 태풍이나 일식, 어느 나라에서 일어날 혁명의 조짐까지, 어떤 사건의 전체적인 조건들의 밀도와 상관관계를 통해 미래를 도출해 읽어내는 방식이 ‘예측’이다. 그런데 번번이 정확도를 벗어나는 예측불허의 연구물이 인간이라던가. 일명 ‘멱함수(冪函數)의 법칙’이다. 빈도는 낮지만 양은 예외값이 엄청나게 큰 것이 존재하는가하면 빈도는 높지만 양이 아주 적은 것들이 무수히 존재하는 이 법칙은 특히 인간행동이 개입하는 많은 영역에서 수없이 등장한단다. 수 백 번을 만나도 그저 그런 사이가 있는가 하면 단 한 번의 눈맞춤으로 한 사람의 일생을 좌지우지하게 하는 큰 인연의 여정, 그 출발점이 되는 것도 한 예일 터. 고작해야 모임에서나 마주치는 친분인 김경순씨, 그런데 어젯밤 ‘당신의 삶을 서둘러 해독(解毒)하라’는 문구에 밑도 끝도 없이 떠오른 그녀다.
깜짝 놀랐다. 나를 너무도 예리하게 진단하는 타인의 눈에. 십여 년 전인가. 속수무책의 처지에 빠져 밤낮없이 먹고 자고, 그 두 가지 일 밖에 할 수 없던 시절이 있었다. 과도한 스트레스는 단것을 부른다고 걸핏하면 입에 물던 P제과의 부피 큰 크림빵에 ‘죽어도 좋아’라는 이름을 붙였다. 차라리 누군가의 발에 밟힌 벌레처럼 이 구차한 몰골의 생을 끝내버리고 싶던 간신히, 아주 간신히 견디던 그 시절, 내 몸은 그 빵처럼 잔뜩 부풀었을 건 자명했다. 그때 김경순씨가 그랬다.
“자기 너무 지친 것 같아”
가파른 언덕을 간신히 넘으니 더 까마득한 높이의 언덕이 기다리더라고 요 근래 무려 십여 키로가 한꺼번에 빠지도록 동분서주를 요구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빠졌다. 열심을 낼수록, 그러니까 빠져나가려 서둘수록 더더욱 깊어지는 늪에 함몰되는 꼴, 그에 따른 외로움과 고통은 나라는 수레의 두 바퀴 축이 되어 덜컹거렸다. 그런 날들의 연속이니 사람 관계도 우스꽝스럽기 그지없어 어쩌다 보이는 타인의 작은 관심을 큰 친절로 오독해 꿀샘에 무작정 코 박는 벌의 행태를 보였을 건 뻔하다. 애초 안온과 고요 속에 깃드는 너그러움과 여유는 내 몫이 아니었다.
상한 갈대라도 하늘 아래선
한 계절 넉넉히 흔들리거니
뿌리 깊으면야
밑둥 잘리워도 새 순은 돋거니
충분히 흔들리자 상한 영혼이여
충분히 흔들리며 고통에게로 가자
뿌리 없이 흔들리는 부평초잎이라도
물 고이면 꽃은 피거니
이 세상 어디서나 개울은 흐르고
이 세상 어디서나 등불은 켜지듯
가자 고통이여 살 맞대고 가자
외롭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고통과 설움의 땅 훨훨 지나서
뿌리 깊은 벌판에 서자
두 팔로 막아도 바람은 불듯
영원한 눈물이란 없느니라
영원한 비탄이란 없느니라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잡을 손 하나 오고 있거니
이런 시 읊조리며 빗발내리는 창가에 서면 절로 떠오르던 얼굴 하나. 이번엔 바짝 마른 몸피의 나를 향해 잘 견뎌내라 두둔의 덕담을 보내는 김 경순씨다. 사실 그 누구도 내 이런 한기(寒氣)를 모를 것이라 생각했다. 감쪽같이 위장했다 자신했으므로. 하긴 ‘모든 것 다 이루었다’는 이름의 싯다르타가 그 귀한 왕자의 신분에도 슬픔과 의문이 가득한 존재였다지 않은가. 타락으로 치닫던 한 사람이 어느 순간, 부처로 등극할 수 있었던 것은 그를 씻겨주고 깨우쳐주는 한 사람의 말과 손길 덕택이라 했다. 오늘 문득 내게 오롯이 떠오르는 한 사람, 김경순씨는 내 삶에 그런 역할을 맡은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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