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기자의 스캔들
김현철(전 언론인)
지금부터 10 여 년 전, 미국 어느 중소도시에서 발행되는 동포신문에는 그 지역 동포사회의 동족 살인, 상대를 불구자가 되도록 가하는 폭력, 악질적인 사기 등 크고 작은 사건 기사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낱낱이 보도되고 있었다.
그래서 당시 그곳 동포사회에서는(특히 피해자의 경우) "다른 미국 동포사회와는 달리 이곳에는 '진짜 신문'이 있어 경찰이 필요 없다"는 말까지 돌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기사 중의 가해자 측과 신문사 측과는 항상 팽팽한 긴장감이 끊이질 않았다. 편집인(필자의 가까운 친구) 가족과 가까이 지내던 어느 부인은 편집인의 부인에게 "우리 모두를 위해 누군가는 고양이 목에 방울을 꼭 채워야하는 것은 맞는데 우리와 친한 댁의 남편 말고 다른 사람이 그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며 편집인 가족의 안위를 걱정했을 정도였다. 그만큼 편집인과 기자들은 가해자 측의 욕을 많이 먹고 있었다는 얘기다. 심지어 어느 비판기사에 등장하는 가해자 측은 편집인을 청부살인하자고 몇 사람이 뒷공론했지만 청부살인까지는 연결되지 않았다고 한다. 이 고장 주정부는 대부분의 미국 주정부가 그렇듯이 경찰이 3백만 달러 이하의 사기사건은 인력 부족으로 수사를 하지 못해 범인을 방관할 뿐이니 대부분 동포사회의 사기사건은 액수 미달로 호소할 데가 없는 실정이다. 하긴 몇 해 전 플로리다 최대 도시인 마이아미에서 가짜 혈액학 박사 학위로 혈액검사실을 경영하던 자가 120만 달러 상당의 사기행각을 벌였는데도 액수 미달로 수사가 전혀 이루어지지 않아 피해자들은 발만 동동 굴을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경찰력도 맥을 못 추니 사기 및 각종 범죄 피해자들에게는 '살아 있는 언론'만이 유일한 화풀이를 대변해 줄 든든한 형님 같은 존재요, 반대로 사기꾼에게는 미국이야말로 지상 천국인 것이다.
어느 날 그 고장 동포사회의 '왕초부인'으로 통하는 미모의 중년 부인이 편집인을 만난 자리에서 깜짝 놀랄 얘기를 들려주더란다. 이 부인은 미국 생활도 오래 되었지만 그보다는 사람들을 포용하는 능력이 훌륭한 사교가로 수많은 선후배 부인들이 이 '왕초부인'의 모임에 소속돼 있어 한인회장 선거 때는 그 영향력이 대단했었다고 한다. 이 부인은 첫 마디가 "양심에 가책을 받아 더는 못 참겠기에 본인을 만나 속마음을 털어 놓아야 마음이 후련하겠다"면서 그동안 일어났던 일을 고백(?)했다고 한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대강 다음과 같다.
'그 전까지 보도된 그 많은 기사는 모두 불의를 고발한 것들로 다른 독자들과 함께 신문을 칭찬하는 등 통쾌하게 느껴왔으나 반년전의 모 사건 기사는 자신과 직간접적으로 연관이 있어서 이에 불만을 품고 편집인을 동포사회에서 매장시켜버리겠다고 결심 끝에 자신이 이끄는 모임의 회원 전원에게 '기자(편집인)를 사회에서 매장 시킬 수 있는 여자와 돈 관련 스캔들'을 극비리에 샅샅이 찾아내 수시로 보고하되 그 범위는 동포들이 흩어져 살고 있는, 남북으로 장장 120마일(192 킬로미터)에 달하는 광범한 지역이었다는 것. 그런데 조사가 시작된 지 3개월이 지났는데도 단 한건의 정보도 들어오지 않아 이상히 여긴 나머지 총회 겸 파티를 열어 회원 전원을 참석시킨 가운데 한 사람 한 사람을 캐물었으나 역시 허사였다는 것, 그 때서야 이 왕초부인은 편집인이 '20여년씩이나 한 곳에 살면서 단 한 건의 스캐들이 없다니!' 하고 놀라는 한 편 이제 편집인의 뒷조사를 시킨 자신의 양심에 가책을 느끼더라는 것, 그래서 오늘 그 내용을 털어 놓고 편집인의 용서를 빌고 싶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 부인은 그동안 편집인의 스캔들을 추적하다가 '대어 대신 피라미'라고 그 고장의 다른 남성들의 스캔들만 빠짐없이 모두 낚았다고 의미 있는 눈웃음을 띄우면서 "선생님, 존경해요"하고 작별인사를 하더란다. 자신이 가해자로 등장하는 사건이 보도될 경우, 미국인들은 물론 국내 동포들은 '언론의 역할'을 알기에 양심상 고개를 숙이는 반면 엘에이(L.A.)나 뉴욕 같은 큰 도시 이외의 작은 재미 동포사회에서는 앙심을 품고 보도기관에 보복할 생각을 한다는 것은 외부 세계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언론이란, 안쪽으로 또는 바깥쪽으로 울퉁불퉁한, 즉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사용해 닳아빠진 얇은 알루미늄 제 냄비 바닥을 우리의 인간 사회로 비유한다면 밖으로 너무 튀어 나온 부분은 안쪽으로 두들겨 펴주고, 또 안쪽으로 너무 높이 솟아 있는 부분은 바깥쪽으로 두들겨서 바닥 전체(사회)를 가능한 한 평평하게 만드는, 옛날에 있었던 ‘냄비수선기능’과 꼭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이 저지른 불의가 보도됐다면 언론은 사회를 "평평하게" 만들기 위한 임무를 수행하는 것일 뿐이지 사감이 있어서가 아닐 것이다. 우리 사회의 언론이 할 수 있는 대로 냄비 바닥을 평평하게 펴주는 올바른 기능을 충실히 수행할 때, 보다 건전하고 공평한 사회가 이뤄지리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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