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숙기자의 횡설수설
혼자가 좋은가, 여럿이가 좋은가
얼마 전 매일 읽고 있는 고도원의 아침편지 내용이 ‘여럿일 때와 혼자일 때’ 였는데, 그 날 글을 읽으면서 꼭 나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용히 살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자꾸만 일이 만들어져 바깥으로 나돌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고 보면 내게 벌어지는 일들은 언제든 어느 한 점이라도 내가 생각했던 것들이 분명하다. 그래서 마음속 작은 생각들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깨닫게 되는데, 하나의 생각은 그 순간 씨앗이 되어 자신의 잠재의식에 자리 잡아 버리는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봄비를 맞은 새싹들처럼 쑥 올라와서는 무심히 짓밟히거나 다행히 예쁜 꽃을 피우거나 둘 중에 하나이다.
그런 것처럼 나는 아이들을 잘 챙기는 엄마이고 싶고 집안을 아기자기하게 잘 꾸며놓고 지글지글 맛있는 요리를 잘하는 살림 잘하는 주부이고 싶었다. 또 한때는 결혼도 하지 않고 꽃을 사랑한 방식선생님처럼 훌륭한 플로리스트가 되고 싶었다. 또 그런가하면 고 박완서 작가나 공지영 작가처럼 마음을 사로잡는 감동소설을 써서 이름난 작가가 되고 싶고, 동아일보 김순덕 기자나 조선일보 강인선 기자처럼 날카로운 시선으로 칼럼을 쓰는 훌륭한 기자이고도 싶다. 또 그런가하면 나경원씨나 강금실씨처럼 자기 색깔이 정확한 여성 정치인을 동경한다.
그러나 높은 곳을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먼저 팔자타령부터 나온다. 내 팔자에 무슨 이라고. 지금보다 더 팔자타령을 한 때도 있었다. 이십대였다. 나는 왜 그렇게 갖춘 것이 없나 하며 많은 고민 덩어리를 안고 살았다. 그래서 20대에 인생의 90% 고민을 다 해버렸다고 농담 삼아 말하기도 하지만,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똑 같지 않을까 싶다.
서울대 김난도 교수님이 쓴 <아프니까 청춘이다> 라는 책이 나이를 불문하고 공감이 가는 것은 누구에게나 청춘은 초라했고 그래서 좌절하고 방황하고 미래가 불안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거꾸로 청춘이니까 아픈거야 라고 말한다면 뭔가 희망이 엿보이는 이면을 느끼게 된다. 꼭 20대가 아니더라도 나이를 먹어가면서 얼마나 초라한 자신을 느끼는가. 열심히 살지만 경제적으로 풍족해지지 않고, 아이들은 하라는 대로 따라오지 않고, 패기 넘친 젊은이들의 모습에 자꾸만 기가 죽고, 옛날에 배웠던 것들은 새로운 정보통신 기술(information technology)에 밀려 쓸모가 없어져 버려 배워야 할 것은 너무도 많다. 또 나라는 정치인들의 권모술수에 좌우지되는 걸 알지만 힘없는 나는 그냥 뒷전에서 욕이나 하면 그만이다. 돌아가는 세상은 힘의 논리에 의해서 움직이고, 힘없는 나는 또 초라하고 그래서 좌절하고 방황하고 머리가 희어지는 미래가 불안해진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꿈을 꾸는 청춘이어서 그런 거야, 하고 싶은 것이 많아 가슴이 아린 청춘진행형인거야 하며 10%를 남겨 둔 것을 다행이다 생각한다. 그런데 농부의 아내에 불과한 내가 왜 그렇게 좌절하고 방황하고 고민해야 하는 것일까. 그것은 이미 혼자일 수 없는 길에 발을 디뎠고 그래서 대중이 있는 외부로 눈이 돌려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살다보면 인생의 전환기라고 생각되는 때가 있다. 20대 나의 멘토는 수녀님이셨다.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콤플렉스가 많은 사람이라고 자책할 때, 위만 보지 말고 폭 넓고 깊이 있게 세상을 볼 수 있도록 안내해주셨다. 나보다 열세 살이 더 많으셨던 수녀님은 여러 삶을 나에게 전해주며 내가 알지 못할 미래에 대해 희망을 주셨는데, 그 하나가 지금 생각하는 것이 영원하지 않다는 거였다. 계속해서 행복을 누릴 것 같던 사람이 불행해지고 불행하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행복해지는 것은, 보이는 것만 보는 눈과 보이지 않는 것까지 보는 눈의 차이와 같다는 거였다.
그런 영향이 있었는지 나는 생각지도 않았던 농촌 총각의 농촌이야기가 참 재미있었다. 푸세식 화장실이 있는 옛날 흙집에서 14인치 텔레비전 한 대만 놓고 사는 젊은 사람에게 흥미가 느껴져서 따라와 살았다. 자전거를 타고 면까지 비포장도로를 달려 자장면을 사먹고 오는 일, 모두가 들로 나간 낮에는 재롱떠는 강아지의 배에 기어 다니는 벼룩을 잡아주는 일. 점심마다 인부들과 마당에서 밥 먹는 일이 매일 소풍 나온 것 같다는 내 자랑에 놀러온 친척 친구들은 한결같이 별로 말이 없었다. 그런데 내가 이런 말 하면 어떤 언니들은 말한다. “말도 마라 나는 부지깽이로 밥한 사람이다.” 더 나이든 엄니들은 이렇게 말한다. “물가에 나가서 얼음 깨면서 빨래하고 물 길어다 불 때서 밥 했는디 뭔 소리여.” 그러면 할 말 없다.
하고자 하는 말은 그런 생활을 얼마나 길게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나나 농촌언니들, 엄니들이 변화되지 않고 계속해서 그런 삶을 살았더라면 아마도 벌써 뛰쳐나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글쓰기를 좋아해서 남들이 잠든 한밤중에 혼자 앉아 있다. 그러나 그 쓰는 일이 한편으로는 바깥의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며 살고자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 혼자 있는 것도 좋아하고 여럿이 있는 것도 좋아하는 사람이 분명하다.
그날 아침 편지글은 윌리암 파워스의《속도에서 깊이로》라는 책에서 퍼온 글이라고 했다. <인간은 외부와 연결되고자 하는 욕망과 혼자만의 시간과 공간을 추구하는 정반대의 욕망을 '동시'에 갖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 두 가지 욕망의 균형점을 찾는 것이다.>
여럿이 어울리는 시간도 필요하고 혼자만의 공간을 갖는 것도 필요하다. 그러나 어떤 정도가 적절한 균형점일까. 그 균형점을 스스로 잘 조절하는 사람은 정말로 행복한 삶을 사는 사람일 것이다. 나는 그 균형점에서 항상 시소를 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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