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혈암, 강진의 미래
박희준(동국대학교 차문화컨텐츠학과 교수)
임진년 한 해가 저물고 있다. 지금부터 780년전, 또 다른 임진년 1232년, 강진군 도암면 만덕산 백련사에서는 우리 삶 속에 연꽃을 피운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었다. 고려 민중불교인 큰 흐름인 만덕산 백련결사(白蓮結社)다. 그 중심에 있었던 원묘국사 료세(了世 1163~1245)는 마치 그의 이름처럼 지금까지의 세상을 마치고, 민중과 함께 하는 새로운 세상을 열고자 하였다. 그리고 그가 임종을 한 곳은 백련사에서 10여리 떨어진 곳의 덕룡산 용혈암이다. 이곳 용혈암에서 원묘국사 료세, 정명국사 천인, 진정국사 천책, 진감국사 무외 이렇게 네 분 국사께서 주석하였고, 원묘국사와 정명국사가 입적하였다. 무엇이 그들을 이 곳으로 이끌었을까?
강진 도암면 덕룡산에 자리한 용혈암은 백두대간의 마지막 기혈이 응집된 곳이다. 백두대간이 남으로 뻗어오다가 호남정맥 삼계봉에서 남동쪽으로 가지친 땅끝 기맥이 불꽃처럼 피어난 월출산 이루고 문득 한 숨을 돌리고 남으로 내달리다 만덕산에서 다시 일어나 시작된 석름과 부용이라는 돌병풍은 능선을 이루어 석문산으로 이어지다가 남쪽으로 뻗으며 문득 덕룡산을 피워내고 이어서 주작산을 펼쳐낸다. 만덕산이 활짝 핀 연꽃이라면 덕룡산은 새롭게 돋아나는 수많은 연봉우리, 그리고 주작산은 연잎처럼 펼쳐진 형국을 하고 있다. 이 능선은 해남의 두륜산에 까지 이어지며, 달마산과 도솔봉을 거쳐 땅 끝에서 바다에 잠긴다. 이 유장한 흐름의 기운이 응집된 곳이 바로 용혈암이다.
만덕산 백련사에서 용혈암으로 산행을 하다보면, 마치 산하대지가 한 품에 어울려 서로를 위로하듯 높이와 깊이 그리고 넓이를 다투지 않는 산세를 따라 걷다보면, 문득 그윽하고 신령스러운 기운을 느낄 수 있다. 당나라 시인 유우석은 ‘산이 높지 않아도 신선이 있으면 이름이 나고, 물이 깊지 않아도 용이 있으면 신령스럽다.’고 했다. 높지 않은 산이지만 덕룡산의 신령스러움이 있는 용혈암은 고려불교와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잊혀졌다가, 다산 정약용에 의해 다시 우리 앞에 드러난다.
1808년 다산 정약용이 다산에 살기 시작되면서 1818년 강진을 떠나기 전까지 용혈암을 봄마다. 먼저 1808년 <용혈행>이란 기행시에서 다산에게 용혈암을 추천한 사람은 주위의 사람인 윤문거의 추천이었고, 그때 다산의 아들인 학포도 함께하였는데 스쳐지나 가듯 용혈암을 지나친다. 그 뒤 1814년 서울로 갔던 다산의 제자인 이청이 정명국사 천인과 진정국사 천책에 관한 기록을 찾아온 것은, 다산이 용혈암을 새롭게 보는 계기가 되었다. 아름다운 풍광속의 용혈암에 머물렀던 아름다운 옛 선인들을 찾아낸 다산은 <유용혈기>와 <제천책국사시권>에서 그 감동을 남기고 있다.
먼저 <만덕사지>에 전하는 <유용혈기>의 용혈암의 모습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가경 무진년 다산에 살면서 부터 해마다 산에 꽃이 무성하게 피면 용혈에 한 번씩 놀러가기로 하여 해마다 늘 하는 일이 되었다. 그러나 가서보면 골짜기는 행하니 텅 비어있는데, 사람을 희롱하는 듯 우렁이 껍질 같이 생긴 것이 용혈이다.’ 마치 우렁이껍질 속에 속이 텅 빈 용혈에는 신령스러운 물이 고여 있고 종유석과 함께 허공으로 난 구멍이 있었다. 비록 주변의 휑한 모습과는 달리 이곳에서 활동한 원묘국사, 정명국사, 진정국사 그리고 진감국사 무외를 통하여 이곳 강진에서 민중불교라는 새로운 세상의 물결을 만들어내었던 백련결사의 마음에 다산은 흠뻑 빠지게 된다. 그렇기에 신라와 고려의 시문들 가운데서 세 사람을 가려낸다면, 신라의 최치원과 고려의 천책스님과 이규보를 꼽으면서, 천책스님이 남기신 향기를 찾아서 해마다 용혈을 찾아간다고 하였다.
그러나 <만덕사지>의 기록과는 달리 <다산시문집>에서는 해마다 용혈암을 찾아간다는 기록 뒤에 ‘천책을 생각하고 슬퍼하며 애석해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처럼 뛰어난 인물이 어찌하여 불교(佛敎)에 빠졌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다산은 진정국사 천책의 모습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것이다. 다산이 천주교의 탄압으로 귀양을 와 난세에 세상을 위해 아무런 힘도 쓸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듯이, 진정국사 천책이 불교에 빠져서 그가 타고난 천분을 다 발휘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동병상련(同病相憐)의 마음에서 비롯한 것이다. 사실 다산이 현실 참여적 사회시를 많이 썼듯이, 진정국사 천책의 시문들에서도 고려시대 이연년의 난이나 항몽운동인 삼별초와의 관계 속에서 피폐한 민중을 구제하고 고생하는 자신의 모습을 스스름 없이 드러내고 있다.
이곳 용혈암에서 만난 천인과 천책이라는 하늘을 이름으로 삼은 두 분의 국사들의 삶 속에서, 다산도 천주학이란 이름으로 가려졌던 하늘을 새롭게 본 것이 바로 용혈암일 것이다. 천인 천책국사가 본 하늘도 백성들이었고, 다산이 본 그 하늘도 바로 백성들이었다.
용혈암이 있는 덕룡산은 유리의 주재료인 규사가 난다. 1980년대부터 이곳 덕룡산은 만덕광업에서 규사를 채취하기 시작하여 이제 30년이 넘었다. 그 결과 이제 우리는 경제라는 이름에 파괴된 자연환경과 문화재유산을 고스란히 물려받게 되었다. 물론 용혈암이 파괴되기 시작한 것은 고려불교가 조선으로 넘어오면서 부터이겠지만, 본격적인 훼손과 파괴는 일제강점시기에 자행되었다.
해남군 옥천면 청신리 탑동마을에는 '용혈암5층석탑'이 마을 한가운데 서 있는데, 이 탑에 여기에 있는 이유가 바로 우리가 우리 것을 지키지 못할 때 생겨나는 비극을 그대로 증언해 주고 있다. 기단석은 일제강점시기에 이 탑을 옮기던 상당부분 유실되어 형태를 잃었고, 2층의 앞뒤 판석과 상륜부 옥개석 등이 모두 없어졌으나 탑에서 나오는 기품이 여느 탑과 다르다. 이 탑의 유래를 기록한 안내문에는 이 탑이 어디에 있었다고는 적시하고 있지 않았지만, 이 탑의 이름이 용혈암5층석탑이라는 점만은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일제시대에 일인들이 마산면 공세포항을 통해 반출하려다가 날씨가 여의치 않자 출항하지 못하던 차에 당시 옥천면장이던 양재정씨와 지역유지들이 돈을 모아 우마차로 실어와 이곳에 세우고, 매년 정월에 제사를 지내오고 있다. 이 용혈암5층석탑에 대하여 <만덕사지>에도 기록이 없는 것을 보아 일제시대 이전에 옮겨졌다가 다시 일본으로 옮겨지려는 수모를 겪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덕룡산과 용혈암5층석탑을 보면 우리가 일제에 강요된 근대화와 경제위주의 현대화를 통해 우리가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는지 극명하게 보여진다. 산허리를 끊기고 허옇게 더러난 덕룡산의 모습은 현대산업화에 발가벗은 우리 욕망의 치부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고, 용혈암5층석탑은 그 보다 더 무서운 망각이라는 사각지대에 자리한 우리 문화재의 처참한 몰골이 그대로 드러난다. 용혈암이라는 큰 주재에 덕룡산과 이 탑이 받고 있는 생각도 못할 푸대접은 우리의 마음을 무겁게 한다. 아 깨지고 부서지고 망가진 것이 어찌 이 탑과 덕룡산 뿐이랴? 덕룡산과 함께 깨진 백련결사 민중불교의 꿈과 우리에게 새로운 미래의 지표를 던져주는 다산이 위안을 받던 강진의 자연이 함께 깨지고 망가졌다.
이제 덕룡산과 용혈암은 새롭게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해마다 펼쳐지고 있는 백련사 팔국사 다례제와 백련결사 학술대회가 그 불씨를 피워놓았다. 이제 그 불씨가 강진인의 마음에 옮겨지고 이곳을 찾는 모든 이들의 마음에 옮겨지기를 바란다. 지치고 힘든 우리를 치유하는 다산, 그 다산을 치유한 덕룡산의 용혈암, 이곳 용혈암에 깃들인 고려 민중불교 천태종의 백련결사의 주된 수행방법은 참회였다.
강진에 숨어있던 한국정신사의 찬란한 한 모습이 부상투성이의 모습으로 우리 앞에 서있다. 나는 덕룡산 앞에서 참회를 한다. 용혈암에서 참회를 한다. 그리고 용혈암5층석탑을 보면서 참회를 한다. 깨지고 부수어지고 망가진 마음을 보듬는다. 모든 사물들이 제 모습 제자리를 찾을 때 아름다운 것이 아닌가? 문화답사일번지 강진의 미래는 용혈암을 어떻게 보존하고 지킬것인가란 문제를 해결함으로서 결정된다. 덕룡산을 지키고, 용혈암을 복원하고, 용혈암5층석탑을 다시 용혈암으로 다시 옮겨와야 한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시급한일은 덕룡산을 지키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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