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성이 오전 8시(辰時)에 마침내 떨어지자 성내는 대학살이 벌어졌다. 특히 아녀자들은 윤간(輪姦)을 당한 후 왜적의 손에 죽었다. 불과 3시간 만에 부산성을 짓밟은 왜적은 서평포(西平浦)와 다대포(多大浦)를 공격하기 시작했는데, 좌수사 박홍(朴泓)은 밀물처럼 몰려드는 왜적을 보고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을 쳤다. 맥없이 무너진 서평포에 이어 왜적들이 다대포를 공격했다. 첨사 윤흥신(尹興信)이 용감하게도 앞장서서 싸우다가 전사하자 병사들은 수박씨처럼 흩어지고 말았다.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은 왜적이 쳐들어왔다는 급보를 받고 긴밀하게 움직였다. 먼저 경상좌병사 이각(李珏)에게 알렸다. 그에게는 날랜 병사가 기백 명 정도는 있고, 동래성은 부산성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두 배 가까이 컸으므로 석성인 동래성에서 10여 일쯤 버텨준다면 조정에서 무슨 조치를 취할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이각은 울산 병영을 떠나 동래를 향해 가다가 부산성이 떨어졌다는 소식과 장발이 죽었다는 사실에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적은 수 만 명인데 고작 기백 명의 병사로 막아선다는 것은 지나가던 개도 웃을 일이었다. 겁을 잔뜩 먹은 이각은 소산역(蘇山驛)으로 물러나 진을 친 다음 동태를 살피고자 했다.
그러나 조정에서 파견된 조방장(助防將) 홍윤관(洪允寬)이 동래성으로 들어갈 것을 재촉하자 하는 수 없이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 마중 나온 송상현을 만났다.
동래부사 송상현은 이각에게 동래성에서 함께 왜병과 싸우자고 간언했다. 그러나 이각은 동래성에 1천 명의 군사가 있고, 군량미 또한 1천 섬이 있으므로 충분히 지킬 수 있다면서 정작 자신은 성 밖에서 지원을 하겠다며 군사를 이끌고 나가버렸다. 이각은 소산역에서 진을 치고 있다가 왜병들이 몰려와 성에 달라붙으면 전광화석처럼 나타나 왜병들을 칠 것이라며 큰소리로 말했다.
다음 날 부산성을 함락시킨 일본군의 주력부대 1만8천여 명은 고니시 유키나가와 소 요시토시 등의 지휘를 받으며 동래성을 공격해 왔다.
“적들이 구름처럼 몰려오고 있습니다!”
척후병이 달려와 송상현에게 보고를 해왔다. 송상현은 이제 이 세상도 마지막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나라를 위해 한 목숨 버리는 것도 사내대장부로서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왜병들이 삽시간에 동래성을 에워쌌다. 그리고 ‘싸울 테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빌리자(戰則戰 不則戰 假道).’ 란 글씨를 높이 내걸고 가볍게 흔들었다. 길을 빌리자는 말은 명나라를 치겠다는 뜻으로 단순히 길만 빌려주는 것이 아니라 조선의 병사들을 앞세워 화살받이를 하고, 그 많은 일본군들의 식량을 대는 일임을 송상현은 잘 알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송상현 역시 어금니를 오도독 깨물며 판자에 붓으로 써내려갔다.
‘싸워서 죽는 일은 괜찮다. 그러나 길은 빌릴 수 없다(死易 假道難).’
글씨를 본 병사들이 우우 함성을 지르며 창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왜병들이 글씨가 내걸리자 일제히 동래성 가까이 다가와서 조총을 쏘아대기 시작했다. 콩 볶듯 요란한 조총소리에 병사들이 얼른 고개를 숙이고 피했다가 화살을 쏘아댔다. 왜병은 일진이 물러나면 이진이 쏘아대고, 이진이 물러나면 삼진이 쏘아댔다. 조총의 탈환은 그야말로 소낙비였다. 갈수록 병사들이 적의 기세에 눌리는 모양이었다.
송상현은 남문(南門)에 올라가서 반나절 동안 병사들을 독려했다.
“힘을 내라!”
“올라오는 놈들의 목을 베라!”
송상현의 말대로 병사들은 성벽을 타고 올라오는 왜놈들이 이윽고 꼭대기까지 올라왔다 싶으면 창끝으로 목을 찔렀다. 찌르고 또 찔러대자 성벽 아래로 썩은 짚뭇처럼 떨어지는 왜병의 비명소리도 조총소리에 묻혀버렸다. 중과부족이었지만 병사들은 열심히 싸웠고, 죽기 살기로 왜병의 성내진입을 막았다.
왜병들이 갑자기 송상현이 지휘하는 남문을 버리고 동문과 서문편으로 몰려갔다. 그 광경을 본 송상현은 말을 타고 독려를 했지만 갑자기 동문이 뚫리면서 왜병이 밀려들었다. 급히 남문으로 돌아왔지만 이미 왜병들은 성내로 들어와 지칠 대로 지친 병사들을 향해 칼을 휘두르자 하나 둘씩 쓰러져 갔다.
목불인견(目不忍見).
이 나라 병사들과 그 병사들을 돕던 백성들이 피를 낭자하게 흘리며 죽어갔다. 전쟁을 구경조차 해보지 못한 순진한 병사들이요, 백성들이었다. 시체 위에 시체가 쌓이고 쌓인 시체는 핏물로 적셔졌다.
송상현은 이제 최후를 맞이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방에서 왜병들을 치겠다며 큰소리를 치던 경상좌병사 이각은 일각이 여삼추처럼 기다렸건만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런 사람이 나의 상전이었다니······.”
그러나 이각을 원망할 여유도 없는 송상현은 북쪽을 향해 네 번 절을 하고 치켜든 칼로 왜병을 향해 찍어 눌렀다. 곁에 있던 송봉수와 신여로가 왜병의 칼을 맞고 쓰러졌다.
“이노옴드을······.”
송상현은 서너 명이 칼을 들고 덤벼들자 좌정을 한 채 호령을 했다. 눈에서는 피가 솟구칠 만큼 분노의 핏발이 엉겨 있었다.
“에잇!”
중간 장수로 보이는 자가 송상현의 목을 쳤지만 제대로 맞지 않자 재차 칼을 높이 치켜들었다.
“너희 놈들이 감히 이 나라 조선을······.”
그러나 미처 말을 마치기도 전에 중간 장수의 칼은 송상현의 목을 쳤고, 그의 목은 두어 계단 밑으로 굴러 떨어졌다.
이 때 유키나가가 나타나 조금 전에 송상현이 앉아 있던 호상에 턱 걸터앉으며 소리쳤다.
“이놈의 목이 동래부사 송상현의 목이렸다!”
“그렇습니다.”
중간 장수가 자랑스러운 듯 어깨를 으쓱거리며 말했다.
“조선충신송공상현지묘(朝鮮忠臣宋公象賢之墓)라고 써서 장사를 지내주어라. 그러기 위해서는 송상현과 연관된 일가친척을 찾아야 한다.”
나이 42세. 임진년 4월 15일에 끝까지 동래성을 지키다가 의롭게 죽었다. 유키나가는 동래부사 송상현이 비록 적이었지만 목숨을 걸고 성을 지켜낸 애국충정을 가상히 여겨 관에 시체를 넣고 땅에 묻었다. 그리고 나중 누구도 알 수 있도록 표지판을 만들어 세웠다.
동래부사 송상현과 함께 함락된 동래성에서 죽은 조선인은 무려 3천여 명이었고, 왜병은 100명이었다. 겨우 목숨을 부지한 나머지 500여 명은 부산으로 이동해 일본으로 끌려갔다.
사흘 뒤인 18일에는 선봉군 700여 척의 대선단에 이어 가토(加藤)의 제2진 2만 2.800명이 부산에 상륙했다. 다음 날에는 구로다(黑田)가 이끄는 제3진 1만 1천 명이 부산에 상륙함으로써 총 5만여 왜병이 불과 며칠을 사이에 두고 조선에 상륙한 셈이었다.
히데요시가 조선침략을 위해 동원된 병력은 총 28만 6.000명으로 조선에 투입된 총 병력은 20만에 이르렀고, 군량미는 16만 명이 반 년 동안 먹을 수 있는 30만 석이었다. 나머지는 조선땅에서 구할 속셈이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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