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원군 · 우경 열전(平原君虞卿列傳)(1)
이 편은 평원군과 우경 두 사람의 열전을 합쳐 놓은 것이다. 평원군 조승은 전국시대의 네 공자 중에서 비교적 평범한 인물이다. 그는 절름발이를 비웃는 애첩을 죽이면서까지 신의를 지켜 선비들을 정성껏 후대했다. 그의 빈객 중에는 명가(名家)를 대표하는 사상가 공손룡도 있었다. 이 편에서는 특히 모수의 활약이 두드러져 보이는데, 그의 위대함은 평원군을 능가할 정도였다. 진나라의 침공으로 인해 도성마저 위태로워지자 그는 자신을 스스로 천거하여 초나라로 가는 사신 대열에 합류했다. 그는 합종에 미온적인 초나라 왕 앞에서 검을 어루만지면서 당당하게 맞선 나머지 끝내 동맹을 맺게 했다. 그를 별 볼 일 없는 자라 판단했던 평원군은 이 일로 “앞으로 다시는 사람됨을 평가하지 않겠다”며 부끄러워한 나머지 모수를 상객으로 삼았다.
평원군(平原君) 조승은 조나라 공자 중의 하나다. 여러 공자들 중에서 가장 현명하고 빈객을 좋아하여 수천의 빈객들이 그의 밑으로 모여들었다. 그는 조나라 혜문왕과 효성왕 때 재상으로 지냈으며 세 번 재상 자리에서 물러났다가 세 번 복귀했다. 그는 동무성에 봉해졌다.
평원군의 집 누각은 민가에 접해 있었다. 민가에는 한 절름발이가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평원군의 첩이 그가 다리를 절룩거리며 물을 길으러 가는 것을 보고는 큰소리로 웃었다. 이튿날 절름발이가 평원군을 찾아와 말했다.
“저는 공께서 선비를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선비들이 천 리를 멀다 하지 않고 공을 찾아오는 것은 공이 선비를 중히 여기고 첩을 하찮게 여긴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불행히도 구루병에 걸려 고생하고 있는데, 공의 첩이 저를 내려다보며 비웃었습니다. 원하건대 비웃은 자의 머리를 얻어 가고자 합니다.”
평원군은 웃으며 대답했다.
“좋다.”
절름발이가 돌아가자 평원군은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저놈 좀 보게. 한 번 웃었다고 나더러 첩을 죽이라고 하니 너무 지나치지 않는가.”
그리고는 끝내 첩을 죽이지 않았다. 그 후 한 해 남짓 사이에 평원군의 빈객들과 가신들이 점차 떠나더니 마침내는 반수도 남지 않았다. 평원군은 이상히 여겨 물었다.
“나는 여러분에게 무례하게 대한 적이 없소. 그런데 어찌 떠나는 자가 많은 것이요?”
문하의 한 사람이 나와 대답했다.
“공께서는 절름발이를 비웃는 자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선비들은 공이 여색을 즐기고 선비를 천시한다며 떠나는 것입니다.”
그러자 평원군은 첩의 목을 베고 직접 절름발이의 집을 찾아가 그 목을 바치며 사과했다. 그후 그의 문하에 빈객들이 다시 모여들기 시작했다. 당시 제나라에는 맹상군, 위나라에는 신릉군, 초나라에는 춘신군이 있었는데, 서로 다투어 선비들을 맞아들였다.
진나라가 조나라의 도읍인 한단을 포위했을 때 조나라는 구원병을 얻고자 평원군을 사자로 보내 초나라와 합종을 하려 했다. 평원군은 문하의 빈객들 중 용감하고 문무를 겸비한 자 스무 명을 동행시키려 했다. 평원군이 말했다.
“말로 해서 맹약을 맺을 수 있다면 다행이겠지만 그럴 수 없다면 초나라 궁에서 피를 흘리는 한이 있어도 반드시 맹약을 맺고 돌아올 것이다. 함께 갈 선비는 밖에서 구하지 않고 빈객과 문하에서 뽑아도 충분할 것이다.”
그리하여 열아홉 명을 뽑았는데, 나머지 한 사람은 적당한 자가 없어서 정원을 채우지 못했다. 그때 문하에 모수라는 자가 앞으로 나오더니 평원군에게 자청하여 말했다.
“이번에 공께서는 초나라와 합종하기 위해 빈객과 문하에서 스무 명을 뽑아 함께 가기로 했다 들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이 채워지지 않았다 하니 저를 데리고 가면 좋겠습니다.”
평원군이 물었다.
“선생은 나의 문하로 들어온 지 몇 년이나 되는가요?”
“3년이 되었습니다.”
평원군이 말했다.
“무릇 현자의 처세는 주머니 속의 송곳과 같아서 숨기려 해도 뚫고 나오기 마련이지요. 선생은 나의 문하에 들어온 지 3년이 되었지만 주위에서 선생을 칭찬한 일이 없고 나도 선생의 훌륭한 점을 들은 바 없소. 이는 선생에게 특별한 재주가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오, 선생은 안 되겠으니 그냥 남으시오.”
모수가 말했다.
“저는 오늘에야 저를 공의 주머니 속에 넣어 달라고 청하는 것입니다. 제가 일찍부터 주머니 속에 있었더라면 송곳의 끝이 아니라 자루까지 뚫고 나왔을 것입니다.”
평원군은 마침내 모수를 동행시켰다. 열아홉 명은 서로 눈짓을 하며 모수를 비웃었지만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았다. 초나라로 가는 도중 모수는 열아홉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모두 모수의 해박함에 탄복했다.
초나라 왕을 만난 평원군은 합종을 제안하며 설득했다. 그러나 해 뜰 무렵부터 시작한 논의는 한낮이 되어도 결론에 이르지 않았다. 열아홉 명이 모수에게 말했다.
“선생이 올라가 보시오.”
모수는 칼자루를 어루만지며 섬돌을 뛰어 올라가 평원군에게 말했다.
“합종의 이로운 점과 해로운 점에 대해서는 두 마디 말이면 끝납니다. 해 뜰 무렵부터 시작한 논의가 지금까지도 결론이 나지 않으니 무슨 까닭입니까?”
초나라 왕이 평원군에게 물었다.
“저 손은 대체 누구요?”
“저의 가신입니다.”
그러자 초나라 왕이 모수를 꾸짖었다.
“당장 내려가지 못할까! 나는 너의 주인과 의논하고 있거늘 이곳이 어디라고 감히 올라오느냐?”
모수는 칼자루를 어루만지며 앞으로 나아가 말했다.
“대왕께서 저를 꾸짖은 것은 초나라가 강하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대왕과 저 사이는 열 발자국도 안 되니, 초나라의 강대함은 믿을 바가 못 됩니다. 대왕의 목숨은 제 손에 달려 있습니다. 저의 주인이 앞에 계신데 저를 꾸짖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상나라 탕왕은 사방 칠십 리 땅을 가지고도 천하의 왕이 되었습니다. 이는 군사가 많아서가 아니라 형세를 이용하여 위엄을 떨쳤기 때문입니다 지금 초나라 땅은 사방 5천 리나 되고 군사는 백만이나 됩니다. 이는 패왕에 오를 수 있는 기반으로 그 강대함 앞에서는 당할 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진나라의 백기는 보잘 것 없는 자인데도 수 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초나라와 싸워 첫 전투에서 언과 영 땅을 빼앗았고, 두 번째 싸움에서는 이릉을 불살랐으며 세 번째 싸움에서는 대왕의 선조를 욕보였습니다. 이는 백대에 이르도록 원한이 되는 일로, 저희 조나라 사람들도 부끄러워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대왕께서는 부끄러운 줄을 모릅니다. 합종은 초나라를 위한 것이지 조나라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어찌 저의 주인 앞에서 저를 꾸짖는 것입니까?“
초나라 왕이 말했다.
“과연 듣고 보니 그렇군. 선생의 말대로 사직을 받들어 합종하겠네.”
모수가 말했다.
“합종을 약속한 것입니까?”
초나라 왕이 말했다.
“그렇소.”
모수는 초나라 신하들에게 말했다.
“계구마(제후들이 맹약을 맺을 때 쓰던 동물의 피로서, 닭과 개와 말의 피를 뜻한다)의 피를 가져오시오.”
모수는 구리 대접을 받쳐 들고 무릎을 꿇은 채 초나라 왕에게 올리며 말했다.
“대왕께서 먼저 피를 마셔 합종을 맹약하십시오. 다음 차례는 저의 주인이시고, 그 다음은 제 차례입니다.”
이리하여 어전 앞에서 합종을 맹세했다. 모수는 왼손으로 대접의 피를 받쳐 들고 오른손으로 열아홉 명을 손짓해 부르며 말했다.
“그대들은 당 아래에서 이 피를 나누어 마시시오. 그대들은 남의 힘에 의지해 일을 이루었을 뿐이오.”
평원군은 합종을 맺은 뒤 조나라로 돌아와 말했다.
“나는 다시는 감히 사람을 평가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많게는 천여 명, 적게는 백여 명의 선비를 보아왔다. 그래서 스스로 선비를 몰라본 적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에 모 선생은 알아보지 못했다. 그는 초나라에 가서 조나라를 주나라의 보물인 구정과 대려(大呂:주나라 왕실에 있던 큰 종으로 천자의 권위를 상징한다)보다도 무겁게 만들었다. 모 선생의 세 치 혀는 백만 군사보다도 낫다. 나는 다시는 감히 선비의 인물됨을 평가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는 모수를 상객으로 삼았다.
평원군이 조나라로 돌아간 후 초나라는 춘신군에게 명하여 군사를 이끌고 조나라를 돕도록 했다. 위나라 신릉군도 왕명이라 속이고 진비의 군사를 빼앗아 조나라 구원에 나섰다. 그러나 구원병이 모두 도착하기도 전에 진나라가 재빨리 한단을 포위했다. 한단은 위급한 지경에 빠져 항복 직전에 이르렀는데, 평원군의 걱정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때 한단의 전사를 관리하는 자의 아들인 이동(李同)이 평원군에게 말했다.
“공께서는 조나라가 망하는 것이 걱정도 되지 않습니까?”
“조나라가 망하면 나도 포로가 될 텐데 어찌 걱정이 되지 않으리.”
이동이 말했다.
“지금 한단의 백성들은 사람의 뼈를 땔나무로 삼고 아이를 바꾸어 잡아먹고 있으니 정말로 위급합니다. 그런데도 공의 후실들은 백 명을 헤아릴 정도이고 노비들은 고운 비단옷을 입고 있으며, 고량진미는 남아돕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거친 베옷조차 입지 못하고, 겨조차 배불리 먹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떤 이는 궁지에 빠지고 무기가 떨어져 나무를 깎아 창으로 쓰고 있는데도 공께서는 온갖 기물과 보물이 그대로입니다.
진나라가 조나라를 친다면 공께서는 이러한 것들을 가질 수가 있겠습니까? 조나라가 안전할 수만 있다면 공께서 이런 것을 걱정할 필요가 없겠지요. 지금 공께서 부인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을 군사들 사이에 끼워 넣고 가진 재물을 모두 내놓아 군사들을 대접한다면 위급하고 어려운 때인지라 모두 감격해마지 않을 것입니다.“
평원군은 이동의 말을 받아들여 3천 명의 결사대를 구성했다. 이동은 그들과 함께 진나라 진영을 향해 나아갔다. 진나라 군사는 그들을 맞아 30리나 퇴각했다. 때마침 초나라와 위나라의 구원병이 도착하자 진나라는 결국 포위를 풀고 물러났고 한단은 다시 보존되었다. 이동은 이 싸움에서 죽고 말았다. 그의 아버지는 이후(李侯)로 봉해졌다.
우경(虞卿)은 위나라 신릉군이 한단을 구한 것은 평원군의 공이라며 평원군을 위해 왕에게 봉지를 더 청하려 했는데, 이 소식을 들은 공손룡은 밤새 수레를 달려 평원군을 찾아와 말했다.
“우경이 위나라 신릉군이 한단을 구한 것을 공의 공로라 하여 봉지를 더 청하려 한다는데 사실입니까?”
“그렇소.”
공손룡이 말했다.
“그것은 당치도 않습니다. 왕께서 공을 조나라 재상으로 삼은 것은 조나라에 공의 지혜와 능력을 따를 자가 없어서가 아닙니다. 또한 동무성을 공에게 봉한 것도 공에게만 공훈이 있고 다른 사람에게는 공훈이 없다고 여겨서가 아닙니다. 이는 단지 공이 폐하의 친척이기 때문입니다. 공이 재상의 인수를 받으면서 무능하다고 사양하지 않고, 땅을 하사하면서도 공로가 없다고 사양하지 않는 것은 스스로 왕의 친척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신릉군 덕택에 한단이 보존된 것을 두고 공의 공로라 하여 봉지를 더 청하는 것은, 전에는 친척이라 하여 성을 받고, 이번에는 조나라 백성으로서 공을 논하는 것이니 옳지 않습니다. 우경이 하는 것은 양다리를 걸치는 것입니다. 성공하면 그것을 대가로 보상 받으려는 것이고 실패하면 봉지를 청했다는 헛된 이름으로 공의 호감을 사려는 것입니다. 그러니 절대 우경의 말을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평원군은 조나라 효성왕 15년에 죽었다. 자손이 그 대를 이었지만 후에 조나라와 함께 멸망했다. 평원군은 공손룡을 후히 대했다. 공손룡은 ‘견백동이(堅白同異)의 변’에 뛰어났다. 견백동이의 변이란 공손룡의 궤변 가운데 하나로 단단하고 흰 돌은 눈으로 보면 희다는 것은 알 수 있으나 단단한지는 모르며, 손으로 만져 보면 단단한 것은 알 수 있으나 흰지는 모른다는 말로서 단단한 돌과 흰 돌은 동시에 성립하는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평원군은 추연(鄒衍:전국시대 제나라의 사상가로 음양오행설을 주장함)이 조나라에 들어와 대도를 논한 후로는 그를 멀리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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