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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삼교 소설가 |
근래에 가수 서유석이 부른 노래 ‘너 늙어봤냐’의 가사 후렴구는 이렇게 끝난다. 너 늙어봤냐 나는 젊어봤단다/ 이제부터 이 순간부터 나는 새 출발이다. 다소 코믹한 느낌을 주는 노랫말이 장수시대를 구가하는 요즘 세태와 어우러져 재미있다.
삶의 한 생애를 우리는 보통 몇 개의 단계로 나누어 말하는 경우가 많다.
어머니 뱃속에서 보낸 태아기를 끝내고 세상에 나오면, 곧 유아기라 하고 조금 더 자라면 아동기, 이어서 청소년기에 접어드는데 이때까지가 성장 시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보편적으로 청년기에 결혼하여 장년기, 중년기, 황혼기를 지나 마지막으로 노년기라고 부르는 시기에 이르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늙음’의 뉘앙스를 선명하게 풍기기 시작하는 황혼기는 어느 때부터일까. 전통적으로는 회갑을 기준하지 않았을까 싶지만, 통칭 장수시대라고 하는 요즘에는 경제적이거나 사회적 활동의 제일선에 비집고 나서기가 버거운 연령대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그러니까 보통 일흔 살 전후쯤이라고 할까.
아무튼 앞서 든 노랫말에서도 ‘인생이 끝나는 것은 포기할 때 끝장이다’고 목청을 높이지만, 황혼기 이후의 ‘노년기’는 자기의 삶을 돌아보는 일과 함께 자신을 매만져 보는 ‘정리기’라고 나는 생각한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미래에 확실한 것 하나는 죽음이다. 배는 진수된 순간부터 침몰하기 시작한다는 말과 같이, 모든 생명은 태어날 때부터 결별을 기약한다. 인간이란 생명이 도달하고야 말 곳은 레테강. 이 움직일 수 없는 실존 앞에 아무리 ‘임아, 그 강 건너지 마오’라고 소리쳐도 돌아오는 것은 적막일 뿐인 거다.
죽음을 우리의 전통적인 생사관에서는 ‘돌아간다’고 말한다. 그러고 보면 애초부터 이승은 ‘소풍이라도 왔었던 것’처럼 우리들이 잠시 머물다 가는 그런 자리였던가. 내가 집착했던 모든 것을 던져버리고 ‘돌아갈’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생각지 않을 수가 없다. 그러자니 자신과 주변을 찬찬히 살피고 지난 삶을 뒤돌아보게 되는데 이것이 곧 삶을 정리하는 노년기 자세의 한 양태일 수밖에 없다. 세월이 더하기를 하면 삶은 빼기를 하고, 욕심이 더하기를 할수록 행복은 자꾸 빼기를 한다는 말과 함께 말이다.
생일이나 무슨 명절이면 꽃다발이거나 빛깔 고운 손수건 아니면 넥타이 같은 것들을 들고 오던 아이들의 선물이 언제부턴가 건강식품이거나 디자인이나 색상을 떠나 보온이나 방풍에 도움이 되는 옷가지들로 바뀌었다. 그렇다고 성질부릴 일인가. 그게 섭리인데 말이다.
강원도에 살고 있는 어느 나이 든 작가는 한때 ‘존버’라는 말을 퍼뜨려 무릎을 치게 했다. 존버란, ‘좆나게 버틴다’는 우리말식 이니시얼이랄까, 암튼 그 약자(略字). 나도 살펴보면, 결혼 이후 평생을 함께 해 온 아내를 필두로 아들 하나에 딸이 둘. 그것들이 짝을 이룬 데다, 손자 손녀가 다섯. 나까지 도합 열셋의 맨 꼭대기에 내가 우뚝 서 있는 꼴인데, 이게 다 ‘존버’ 정신으로 버티어 오며 세월 속에서 건져낸 소득이랄까 흔적이다. 그 말을 퍼뜨린 작가는 그의 트위터에 근래 건강에 문제가 있지만 ‘존버’ 정신으로 투병 중이라고 올려놓았었다. 그의 존버 정신이 병마와의 겨루기에서도 승리하기를 바란다.
‘삶의 정리’를 생각하는 마지막 단계인 노년기의 이 나이에 먼저 떠오른 것은, 채우기 위해 허덕일 것이 아니라 내려놓기 위해 기도하라는 말이다. 젊어서는 그토록 그악스럽게 소유에 집착했던 손아귀의 힘이 스르르 풀리는 것을 어쩔 수가 없다. 사람이 늙어간다는 것은 숙성일까 부패일까. 누구나 시간과 함께 성숙해지거나 숙성되기를 바랄 게다. 그런 뜻에서 내가 읽었던 글 가운데 이런 내용의 글 한 토막이 떠오르기도 한다. ‘당신이 태어날 때 당신은 혼자 울었고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웃었습니다. 당신이 죽을 때는 당신 혼자만 미소 짓고, 당신 주위의 모든 사람들은 우는 그런 삶을 사십시오’라는…….
널리 알려진 이야기다. 록펠러는 33세에 백만장자가 되었고, 53세에 세계 제일의 갑부가 되었는데 암을 선고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사람들의 관심은 그의 재산에 모아졌고, 상속자들은 그의 죽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록펠러는 자기의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해 버렸다. 이후 그의 암세포는 깨끗이 사라지고 98세까지 행복을 누리며 살았단다. 긴 인생은 충분히 좋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좋은 인생은 충분히 길다는 말처럼 마지막 순간까지 스스로도 부끄럽지 않고 남이 보기에도 좋은 삶을 매만지고 껴안아야 할 일이다.
젊은 날을 치열하게 살아야 자신을 정리하는 노년기에 보석처럼 빛나고 아름다운 추억도 가슴에 안아 볼 수가 있다. 산의 정상에 오르기 위해 천신만고 땀을 흘리던 날도 가슴이 뛰고 좋았지만, 이만큼 물러나 삶을 정리한다는 마음으로 둘레길을 걷는 시간도 결코 처량한 것만은 아니다. 마음먹기에 따라서는 나직하고 평탄하고 호젓한 둘레길이 마음을 다독이고 어루만져 주어 아늑하고 소중하다. 아렌트는 그의 저서 <인간의 조건>에서 ‘인간은 반드시 죽을 운명이라고 해도, 죽기 위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시작하기 위해서 태어난다’라고 했다. 옳은 말이다. 살아 있는 한 무엇인가 싱싱하게 새로운 시간을 위해 자신을 투자한다는 것은 얼마나 가슴 설레고 보람 있는 일인가. 그렇더라도 노년기에 이르면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정리하는 ‘마음의 시간’도 가져볼 일이다.
애팔래치아 트레일. 장장 3500킬로미터의 트레킹코스 같은 삶의 끝자락에서 낙조의 아름다운 순간을 생각해 본다.
이삼교<소설가>
전남 완도 産
1938년 生
조선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광주 전남매일신문(현재 광주일보와 통합) 신춘문예 소설 당선(198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1981년)
소설집 <아살박>, <돌멩이와 까마귀>, <그 목선의 계절>, 기타
꽁트집<네 사람이 쓴 일흔 두 편의 짧은 이야기>(공저), <괜찮게 생긴 여자>.
수필집 <황토에 부는 바람>(공저)
광주 문학상 수상
한국문인협회, 한국소설가협회, 광주 전남 소설문학회, 광주 문협 등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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