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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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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시인 윤광제의 기록화(민화) 이야기10
등림영회도(登臨詠懷圖)

민화를 구분하는 방법은 민화의 용도와 기법, 재질, 주제 등에 의해 다양하게 나눌 수 있다. 이러한 민화의 구분은 연구하는 사람에 따라 각각 그 방법과 내용이 달라지는데 이는 민화를 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민화 연구가는 일본의 야나기 무네요시와 조자용씨를 들 수 있는데 야나기 무네요시는 민화를 문자민화, 길상과 연관된 민화, 전통적 화제의 민화, 정물민화, 도교에서 비롯된 민화 등 다섯 가지로 구분했다.

반면 조자용씨는 민화를 크게 한화(韓畵)라 하고 이를 순수회화와 실용회화로 구분하고 있다. 여기에 상징별로 구분하면 수(壽), 쌍희(囍), 자복(子福), 재복(財福), 영복(寧福), 녹복(祿福), 덕복(德福), 길상(吉祥),벽사, 민족(民族) 등 열가지로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를 다시 화제별로 나누어 산수화(山水畵), 수석도(壽石圖), 화훼도(花卉圖), 소과도(蔬果圖), 화조도(花鳥圖), 축수도(蓄獸圖), 영수화(靈獸畵), 어해도(魚蟹圖), 초충도(草蟲圖), 옥우화(屋宇畵), 기용화(器用畵), 인물화(人物畵), 풍속화(風俗畵), 도석화(道釋畵), 기록화(記錄畵), 설화화(說話畵), 도안화(圖案畵), 지도화(地圖畵), 혼성도(混成圖), 춘화도(春畵圖) 등 20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고을신문에서는 조자용씨의 구분법을 적용해 최근 설화화(說話畵)에 해당하는 ‘구운몽도’를 연재한 적이 있다. 이번에는 민화를 풀어주는 남자 ‘윤광제 시조시인’이 기록화를 통해 그림 속에 담겨있는 역사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한다. -편집자 주-

소제목 : 登臨詠懷 등림영회 : 백두산에 올라 자신의 포부를 시에 담아 읊다

등림영회도(登臨詠懷圖)는 조선 세조 때 무신인 남이(南怡, 1441~1468)가 약관의 나이에 토벌군 대장이 되어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돌아오는 길에 백두산에 올라 시를 읊었다는 일화를 그린 그림이다.

이시애의 난에 대해서는 어유소 장군편에서 다뤘으니 간단히 설명하기로 하겠다. 함경도 일대에서 지역차별과 지역 호족에 대한 탄압을 두려워하여 일으킨 반란이었는데 이때 남이장군이 총대장이 되고 귀성군 준, 어유소 등과 함께 토벌에 성공한다. 그리고 토벌군이 복귀하던 중 백두산에 올랐고 이때 남이 장군이 시를 짓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白頭山石摩刀盡 (백두산석마도진) 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 다 없애고

豆滿江水飮馬無 (두만강수음마무) 두만강 물은 말을 먹여 다 없애리.

男兒二十未平國 (남아이십미평국) 남자 나이 스물에 나라를 평정치 못하면

後世誰稱大丈夫 (후세수칭대장부) 후세에 그 누가 대장부라 부르랴.

 

무신이자 시인이었던 남이의 기개가 한껏 뿜어져 나오는 멋진 시였지만 단 세 글자 때문에 그의 운명이 바뀌고 마는데……

 

소제목 : 비극의 대명사, 남이 장군

남이의 할아버지는 의산군 남휘이고 할머니는 정선공주(태종과 원경왕후의 넷째 딸)였다. 부인은 좌의정 권람의 딸이며 그의 본관은 의령이다. 권람은 세조의 공신이었던 덕에 좌의정까지 올랐는데 그의 딸과 결혼을 함으로써 젊은 시절부터 주목을 받았다.

1457년 (세조 3년) 17세의 어린 나이에 무과에 응시하여 장원 급제했고 이후 세조의 총애를 받게 된다. 이순신 장군이 32세에 급제한 걸 보면 남이 장군의 출세는 대단히 빠른 것으로 누가 보더라도 그의 미래는 떼 놓은 당상이었다. 게다가 세조의 총애, 척신(할머니가 왕족), 장인이 좌의정. 소년 출세까지 그 당시로 보면 시쳇말로 엄친아(엄마 친구 아들) 중의 엄친아였다.

 

그런 그에게 출세의 기회가 왔다. 1467년(세조 13년) 함경도 일대에서 이시애의 난이 일어난 것이다. 조정에서는 토벌대를 구성했고 그는 대장이 되어 귀성군 준, 강순(康純), 어유소 등과 함께 출정한다. 토벌대 선봉에 선 그의 공훈이 조정에 알려지고 출정 중에 당상관으로 승진하는 행운을 누린다.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는데 가장 치열했던 북청 전투에 대해서는 실록에 기록될 만큼 뛰어난 활약을 보였다. ‘북청 전투에서 남이는 진(陣) 앞에 신출귀몰하면서 사력(死力)을 다해 싸웠고 그가 가는 곳마다 적이 쓰러졌다. 당시 그의 몸에 화살을 4~5대나 맞고도 낯빛에 변함이 없이 의연했다(세조 13년 7월 14일).

이러한 그의 활약에 고무된 조선 조정은 난이 평정된 뒤에 그에게 적개공신(敵愾功臣) 1등과 의산군이라는 작위를 포상으로 내린다.

그의 출세가도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곧이어 서북변에 건주위(建州衛) 여진족이 출몰하자 평안도선위사 윤필상의 지휘하에 우상대장이 되어 선봉으로 적진에 들어가 여진족의 수괴를 척살하는 공을 세운다. 이러한 군공으로 주장(主將)이었던 강순과 윤필상은 1등, 남이 장군과 어유소 장군이 2등에 책록된다.

군대에서 전투경험을 뛰어 넘는 공은 없다고 하는데 남이 장군이 그랬다. 이시애의 난이 평정되고 공조판서(세조 13년 12월 17일)에 임명되었고, 반년 뒤에는 오위도총부 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을 겸직했으며(세조 14년 7월 17일), 그로부터 한 달 뒤에 병조판서에 발탁되었다(세조 14년 8월 23일). 오늘날로 치면 27세에 국방부 장관이 됐으니 참으로 대단한 승진속도였다.

예전에 구운몽도에서 설명한 바 있는 역대 최연소 인물들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고건 전(前) 총리(37세, 최연소 도지사), 안대희 전(前) 대법관(25세 최연소 검사), 김영삼 전(前) 대통령(26세 최연소 국회의원), 백선엽 전(前) 육참총장(31세 최연소 육군참모 총장), 김종필 전(前) 총리(45세 최연소 국무총리)]

그러나 어르신들 말씀 중 절대하지 말아야 하는 것에 ‘소년(少年) 출세(出世)’, ‘중년(中年) 상처(喪妻)’, ‘말년(末年) 무전(無錢)’이 있다. 유감스럽게도 남이 장군에게는 소년 출세에 해당하는데 그동안 남이 장군을 지지해주던 세조가 죽자 한명회와 신숙주의 노골적인 견제를 받기 시작한다. 평소 남이의 승진과 세력 확장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신숙주, 한명회 등이 강희맹(姜希孟), 한계희(韓繼禧) 등의 훈구 대신들을 통해 ‘남이는 병조판서직을 수행할 능력이 없다’며 맹비난에 나섰다. 평소 남이를 탐탁지 않게 여기던 예종은 남이를 병조판서에서 해임하고 겸사복장직에 임명한다.

한편 같은 무장(武將)이지만 서얼이라는 신분의 족쇄로 늘 승진에 뒤쳐졌던 유자광이 그동안 숨겨왔던 질투의 비수를 꺼내들었다. 똑같이 생사를 넘나드는 전장에서 공을 세웠건만 늘 좋은 상은 남이가 가져가는 것이 유자광은 불만이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때마침 남이가 병조판서에서 물러나자 실권을 잃었다고 판단하고 모사를 꾸미기 시작한다.

당시 왕인 예종은 남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남이는 무예에 뛰어나고 성격이 강직하고 아버지 세조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어 엄친아로 불리는데 반해 자신은 능력도 특출하지 못한데다가 아버지 세조로부터 신뢰도 얻지 못한다는 자괴감에 남이에 대한 시기와 질투는 해가 갈수록 깊어졌다.

유자광은 남이의 말 한마디 행동거지 하나 하나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그러다가 혜성을 보고 남이가 중얼거리는 말을 기억해 뒀다가 남이를 모함하는데 쓴다.

‘혜성이 떨어지자 이를 두고 나라에 새임금이 나온다느니 하면서 감히 딴 마음을 품고 있다.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며 오는 길에 지었던 시에서도 [男兒二十未得國 (남아이십미득국) 남자 나이 스물에 나라를 얻지 못하면 後世誰稱大丈夫 (후세수칭대장부) 후세에 그 누가 대장부라 부르랴.]라고 했다’며 모함을 시작했다.

예종은 유자광의 의견을 곧이 듣고 남이를 추궁하기 시작한다. 위기에 처한 남이는 대신들에게 구명을 요청했지만 다들 외면했고 결국 역모를 꾸몄다는 죄로 사형이 확정되고 만다.

남이의 가정사는 대단히 안타까운데 부인 권씨는 요절했고, 장인 권람도 일찍 죽었다. 재혼한 부인과 첩 2명이 더 있었으며, 재취 부인은 그가 처형될 때 함께 처형되고 두 명의 첩은 남이의 옥사 직후 노비로 끌려갔고 딸도 노비가 되었는데 딸을 노비로 데려간 사람이 한명회였다.

권람의 아들들은 남이의 첫 번째 부인이었던 누이(부인 권씨)가 일찍 죽어서 남이 집안과 아무런 관련이 없고 교류도 없다고 주장해 멸문지화를 면하게 된다. 그리고 1468년 10월 27일 남이는 군기감 앞 저자거리에서 80세의 영의정 강순 등과 함께 거열형(車裂刑)을 당한다. 또한 그를 변호하던 조숙(趙淑) 등도 처형당해 남이와 그의 추종 세력은 와해되고 만다. 이 사건은 임진왜란 이전 까지는 역모 사건으로 인식되었으나 연려실기술에서 유자광의 계략에 의한 것으로 기록되어 재조명을 받게 된다. 1818년(순조 18) 우의정 남공철의 주청으로 강순과 함께 관작이 복구되었고 묘소는 경기도 화성시 비봉면 남전리에 있으며 창녕의 구봉서원(龜峯書院), 서울 용산의 용문사(龍門祠) 및 서울 성동의 충민사(忠愍祠)에 배향되었다.

 

남이 장군은 청년 시절에 처녀를 괴롭히는 악한 귀신을 보고 쫓아내었다는 이야기가 있어서 인지 무속인들이 모시는 장군신(최영, 임경업, 남이, 관우) 중 한 분으로 알려져 있다. 참고로 남이 장군도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다음주 계속

 

                                                               사진설명: 등림영회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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