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진고을신문 : 윤광제의 기록화(민화) 이야기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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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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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광제의 기록화(민화) 이야기 13
창의토왜도(倡義討倭圖)

민화를 구분하는 방법은 민화의 용도와 기법, 재질, 주제 등에 의해 다양하게 나눌 수 있다. 이러한 민화의 구분은 연구하는 사람에 따라 각각 그 방법과 내용이 달라지는데 이는 민화를 보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민화 연구가는 일본의 야나기 무네요시와 조자용씨를 들 수 있는데 야나기 무네요시는 민화를 문자민화, 길상과 연관된 민화, 전통적 화제의 민화, 정물민화, 도교에서 비롯된 민화 등 다섯 가지로 구분했다.

반면 조자용씨는 민화를 크게 한화(韓畵)라 하고 이를 순수회화와 실용회화로 구분하고 있다. 여기에 상징별로 구분하면 수(壽), 쌍희(囍), 자복(子福), 재복(財福), 영복(寧福), 녹복(祿福), 덕복(德福), 길상(吉祥),벽사, 민족(民族) 등 열가지로 구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를 다시 화제별로 나누어 산수화(山水畵), 수석도(壽石圖), 화훼도(花卉圖), 소과도(蔬果圖), 화조도(花鳥圖), 축수도(蓄獸圖), 영수화(靈獸畵), 어해도(魚蟹圖), 초충도(草蟲圖), 옥우화(屋宇畵), 기용화(器用畵), 인물화(人物畵), 풍속화(風俗畵), 도석화(道釋畵), 기록화(記錄畵), 설화화(說話畵), 도안화(圖案畵), 지도화(地圖畵), 혼성도(混成圖), 춘화도(春畵圖) 등 20가지로 구분하고 있다.

고을신문에서는 조자용씨의 구분법을 적용해 최근 설화화(說話畵)에 해당하는 ‘구운몽도’를 연재한 적이 있다. 이번에는 민화를 풀어주는 남자 ‘윤광제 시조시인’이 기록화를 통해 그림 속에 담겨있는 역사이야기를 들려주고자 한다. -편집자 주-

소제목 : 倡義討倭 창의토왜 :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하다

창의토왜도(倡義討倭圖)는 임진왜란 때 함경도에서 왜군 격퇴의 공을 세운 문신이자 의병장인 정문부에 대한 이야기이다.

선조 25(1592년)에 왜군이 함경도로 들어와 국경인, 국세필 등이 반란을 일으켜 왜군에 가담하였고 그 세를 넓히고 있었다. 이때 북평사 정문부는 숨어 있다가 이붕수가 의병을 일으킨다고 하자 그의 집에 달려와 최배천, 지달원, 강문우등과 합세해 창의대장으로 의병 300명을 이끌고 거병했다. 그는 부성(경성)에 있는 국세필을 달래어 의병을 성안으로 끌어들여 성 남쪽에서 노략하던 왜군을 물리쳤다. 이후 정문부는 국세필과 그의 일당들을 참수하고 성의 질서를 바로 잡았다고 한다.

 

줄거리만 보면 대단히 간단한 사안 같지만 사실 정문부의 활약상은 그 사연이 특별하다. 정문부가 있던 함경도 회령부근은 조선 침략시 고니시 유키나가와 함께 일본군의 선봉을 달리던 가토기요 마사가 침략했던 곳으로 여기에서 조선의 두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이 잡혔고 그를 따르던 김귀영, 황정욱·황혁 부자, 남병사 이영, 부사 문몽헌, 온성부사 이수 등이 그 가족들과 함께 사로잡히게 된다. 그런데 이것은 가토기요 마사가 직접 잡은 것이 아니라 경성부 사노(寺奴) 국세필과 그의 조카이자 경성 아전으로 있던 국경인, 명천 아전 정말수 등이 부(府)에서 백성들을 선동하고 반란을 일으키더니 앞서 말한 거물들을 모조리 잡아 적진에 넘긴 것이었다.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임진왜란 초기, 정문부는 적탄에 총상을 입고 도망쳐 부령에서 거지처럼 돌아다니다가 이름을 바꾸고 용성에 있는 어느 무당의 하인이 되었다고 한다. 경성(鏡城)사람 이붕수(李鵬壽)가 의병(義兵)을 일으켰을 때, 의병에 가담한 경성 유생 지달원(池達源)이 정문부의 소식을 듣고 정문부를 찾아가 함께 싸울 것을 청하자, 처음에 정문부는 지달원의 말을 믿지 않고 난색을 보이다 마침내 허락한다.

여기저기서 장사들을 모으자 강문우(姜文佑) 등과 함께 2백여 명의 군사들이 모였다. 또한 앞서 도망쳐 산에 숨어들었던 경성부사 정현룡과 경원부사 오응태도 산중에서 나와 힘을 보탰다. 이렇게 해서 의병의 지휘부는 정문부를 창의대장으로 추대하고 정현룡과 오응태는 차장으로 정문부를 보필케 했다.

 

정문부는 임진왜란으로 한참 혼란한 시기에 큰 힘을 들이지 않고 국세필을 잡기 위해 하나의 계책을 내놓는데……

먼저 국세필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쉽게 속일 수 있을 것으로 마음먹은 정문부는 현재 조선에는 왜적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북쪽의 오랑캐도 있다고 전제한 뒤 가까운 시일 내에 북쪽 야인들이 들이닥칠 것이라며 불안감을 조성했다.

이에 놀란 국세필은 정문부에게 계책을 요구했고 정문부는 그에 대해 “제가 장정들 여럿을 모아 놓았으니 힘을 더해 북로(北虜:북쪽 오랑캐)를 맞으면 두려울 것이 없을 것”이라고 답했다.

정문부의 계책에 무릎을 탁 치며 좋아한 국세필은 당장 장부들을 불러 들이라고 청했다. 세필이 허락하자 의병들은 손쉽게 세필의 진영에 들어 갈 수 있었고 다음날 아침이 되자 정문부는 기(旗)를 높이 세우고 북을 크게 울린 뒤 국세필로 하여금 남쪽 성루에 올라 군중들에게 전투를 독려하는 말을 하라며 꾀었다. 정문부는 사전에 계획했던 대로 강문우를 남쪽 성루에 대기시켜 놓고 재빨리 생포하고는 목을 베어 버린다.

국세필을 처형한 뒤, 정문부는 즉시 군사를 인솔하여 남쪽 명천으로 가서 말수 등을 잡아 죽였다고 한다.

정문부와 관한 또 다른 얘기로는 정문부가 성안으로 들어갈 때 마침 길주에 있던 왜의 순라(巡邏) 40여 명이 들이닥치는 바람에 성안이 떠들썩해지자 강문우가 결사대 20여 기를 모아 추적했고 영강역(永康驛)까지 쫓아가 몰살시켰고, 이때 사기를 바탕으로 국세필을 처형할 수 있었다고도 한다.

 

한편 국세필의 조카 국경인은 정문부가 회령지역에 ‘민족의 배신자를 처단하자’는 격문을 띄우자 회령 유생 신세준과 오윤적이 뜻을 세워 국경인을 붙잡고 참살한다.

 

그림을 자세히 보면 성 안에서 참형을 기다리는 죄인들이 보이는데 이들이 국세필과 그의 추종자들이다. 처형을 기다리는 자들의 복색을 보면 친왜의 행태가 보인다. 또한 우측하단을 보면 정문부의 의병들이 적을 격퇴하는 장면이 이어지는데 이는 명천에서 벌어진 전투로도 해석되고 왜의 순라 40여 명을 몰살시킨 장면을 묘사한 것으로도 해석된다.

 

소제목 : 비운의 장군 정문부

정문부(鄭文孚, 1565년 ~ 1624년)는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의병장으로 본관은 해주(海州), 호는 농포(農圃), 자는 자허(子虛), 시호는 충의(忠毅)이다.

정문부는 1565년 한양에서 부사 정신(鄭愼)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할아버지는 경기도관찰사를 지낸 정언각(鄭彦慤)이며, 할머니는 이조판서 신공제(申公濟)의 셋째 딸이었다.

그는 1585년(선조 18년) 생원, 1588년(선조 21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한성부참군이 되었다. 그 후 홍문관 수찬,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 등을 역임하였고, 1591년 함경북도 북평사(北評事)가 되어 북쪽의 여러 진을 순찰했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회령의 국경인이 임해군과 순화군 두 왕자를 가토 기요마사에게 넘기고 항복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정문부는 이때 반역을 한 국경인을 제거한 공을 세웠으나 북평사 관직이 아닌 의병장 신분으로 활약한 점, 순찰사 윤탁연이 조정에 정문부의 공을 똑바로 전하지 않았기에 크게 포상을 받지는 못한다. 결국 챙겨준 것이 영흥부사였다. 심지어 정문부의 논공행상에 대한 실사가 필요하다는 의견에 조정은 사신을 보내는데 윤탁연이 사신에게도 뇌물을 주고 진상 조사를 무마시킨다.

1615년에 이르러 정문부는 부총관에 이어 다시 병조참판으로 임명되지만, 북인의 횡포에 관직을 고사하고 야인으로 돌아간다.

1623년 정문부는 전주부윤이 되었지만, 1624년(인조 2년) 이괄의 난에 연루되었다는 누명으로 고문을 받다가 죽게 되는데 향년 60세였다. 사후에 함경도 지방 백성들이 그의 죽음을 원통하다며 탄원을 했고 조정에서는 그제서야 충의(忠毅)라는 시호와 함께 좌찬성을 제수한다. 정문부의 후손들과 함경도 백성들도 늦게나마 원통함을 풀게 되었다며 답답했던 가슴을 쓸어내렸다고 한다.

정문부를 모시는 사당으로는 경성의 창렬사, 부령의 청암사, 진주의 충의사(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61호)가 있고, 숙종 때 이 전투를 기념해 함경북도 길주에 북관대첩비를 세웠다.

조선시대에 당시 수없이 많은 애국지사들과 장수들이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목숨을 잃었는데 정문부도 그 중 하나였다. 김덕령 장군처럼 임진왜란 때 혁혁한 전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공을 인정받지 못했다. 오히려 반역이라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옥중에서 허망하게 세상을 떠났다.

정문부는 유언으로 두 아들에게 “벼슬을 구하지 말고 남쪽 지방인 진주에 가서 살라”고 전했으니 공직의 덧없음과 억울함이 그대로 묻어나는 대목이라 할 수 있겠다.

 

                                                                     1. 일전해위도

 

※ 그동안 민화와 전쟁기록화 등을 연재했던 시조시인 윤광제씨가 개인적 사정으로 인해 연재를 마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사랑해준 독자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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