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과 같은 유형의 재산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일어설 수 있는가?”
김재철은 돈이나 배경으로 일어선 사람이 아니다. 그는 신용으로 일어선 사람이다. 남이 어떻게 보든 자신이 정한 높은 기준을 두고 그것을 향해 전진하며 스스로를 갈고닦는 사람이다. 인생은 긴 게임이다. 한두 번 정도는 속임수로 돈을 벌 수도 있겠지만 길게 보면 그 돈을 지키는 일은 쉽지 않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그래서 직원들에게 “진실하라. 하는 척 시늉만 내지 마라”고 하기도 하고 “거짓말하지 마라. 윗사람은 몰라도 아랫사람은 다 안다”라고 강조하기도 한다.
그가 정직에 대해 두는 비중은 사업 초기부터 어떻게 경영정보를 공유해왔는지를 살펴보면 알 수 있다. 그 당시 이익분배를 놓고 선주, 선장, 선원들 사이에 불미스러운 일이 자주 일어나곤 했다. 그는 나름의 투명한 경영을 정착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1980년대 이전부터 원양업계는 노사분규가 심했다. 선원들은 일본 선원들에 비해 대우가 낮은 이유를 납득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들은 시장, 어장, 자본, 기술 모든 면에서 일본에 열세인 점을 알지 못했다. 20퍼센트나 되는 관세를 일본에 내야 하고 어구가 고가라는 사실도 잘 몰랐다. 선원들은 30만 달러 중고선을 들여와서 1년에 30~40만 달러를 벌면 1년만 사업을 잘해도 배값을 충당할 수 있는데 처우가 좋지 않은 이유가 뭔가라는 의구심을 가졌다.
그래서 김재철은 선장과 선원이 결정되면 본사에 와서 원가와 수익, 비용에 대해 공부하게 했다. 그들은 사업에서 수선비, 감가상각비, 통신비, 유류대 등이 얼마를 차지하는지를 학습했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경영 성과를 공유한 것이다. 그 일을 이미 1970년대부터 실시했다. 선장과 선원들이 공부하며 직접 계산을 해보니까 1~2만 달러 정도만 남거나 적자가 될 때도 있었다. 공부가 끝날 즈음이면 김재철은 당부의 말과 함께 질문을 건넸다.
“당신이라면 이 사업을 하겠나?” 참가한 사람들 가운데 50퍼센트 정도는 “저는 안 하겠습니다”라고 답한다. 또한 일부는 “제가 배운 것이 이것밖에 없으니까 내가 잘하는 것을 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김재철은 막연히 정직하라고 말하지 않고 숫자로 실상을 알렸다. 그래서 초창기에는 선장과 선원들의 자녀들을 경리팀에 뽑아서 일하도록 했다. 아들과 딸들이 전체 매상에서 경비를 제외하고 회사와 선원들에게 어떻게 분배하는지 알도록 했다. 이런 제도가 자리를 잡으면서 “동원은 우리를 속이지 않고 정확한 계산을 하기 위해 애쓴다”는 믿음이 확산되었다. 이렇게 신뢰가 쌓이면서 변화가 일어났다. 드물긴 하지만 원양어업에서 해상 사고는 일어난다. 그럴 때 회사를 신뢰했기 때문에 피해자들이 무리한 요구를 하는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았다. 김재철은 “이런 신뢰가 오늘의 동원이 있게 된 바탕이다”라고 힘주어 말한다.
사업을 하거나 권력을 잡거나 얼굴이 알려지면 “절대로 검찰청 포토 라인에는 서지 않아야 한다”고 다짐하게 된다. 그만큼 불명예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1976년 12월, 김재철은 단 한 차례 검찰조사를 받은 적이 있었다. 고려원양의 이학수 사장이 기업을 상장시키면서 43.7퍼센트의 주식을 20여 명의 지인과 임직원들 명의로 위장 분산시켜 법인세 6,660만 원을 내지 않은 것이다. 검찰에 소환되자마자 담당 검사는 “허리띠를 빼라”고 요구하면서 “단신 이름으로 고려원양의 주식이 배정되어 있는데 알면서 이름을 빌려준 거요?”라고 물었다. 김재철도 모르는 사이에 이름이 도용당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문제없음으로 일단락되었다. 다시 한 번 “어쩐 법이라도 법은 지켜야 한다”는 그의 생각을 뒷받침해준 사건이었다.
어려움을 피하지 말고 맞서야 한다.
“태풍을 만났을 때 피하려 하거나 우회하면 배가 뒤집히고 만다.”
태풍을 헤쳐 나갔던 경험은 김재철에게 값진 교훈을 준다. 힘이 들더라도 정면으로 바람고 맞서야 할 때는 맞서야 한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도망치고 싶은 순간도 있다. 하지만 그런 일일수록 심기일전하는 각오로 임해야 한다는 것이 김재철의 인생철학이다. 그는 직원들에게 “인생에 어디 쉬운 일이 있는가? 일을 하다 보면 어려움이 있게 마련이다. 어려움을 피하려 하면 더 큰 어려움이 오게 된다”고 말한다.
그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청문회에 섰던 적이 있다. 어려운 상황에 처한 그는 정면 돌파를 선택했다. 사건은 2004년 1월, 16대 국회 당시 법사위 “불법대선 자금 의혹 등 진상조사청문회”에서 민주당 김경재 의원이 “동원산업(회장 김재철)이 자금 세탁을 통해 50억 원을 노무현 대통령 측에게 전달했다”고 주장해서 파문이 일었다. 그런데 정보를 제공한 전 국정원 경제팀장이 잠적해버림으로써 김 의원은 구체적인 추가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동원산업 측에 의해 명예훼손 혐의로 소당했던 사건이 있었다.
청문회에 김재철의 참석 여부를 두고 의견이 갈렸다. 자식들은 아버지가 평생 올곧게 살아왔는데 스캔들의 주인공처럼 비춰지게 되었으므로 청문회에 나가 진실을 밝히기를 바랐다. 그러나 전문경영인들은 “나가봐야 의혹만 키우고 망신을 당할텐데 나가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특히 그를 아끼는 주변 사람들은 “나가도 실익이 없습니다. 잠시 해외에라도 다녀오시지요”라고 권했다. 면식이 있는 국회의원들은 청문회라는 자리에서 의원들이 사람을 어떻게 망신 주는지를 잘 알기 때문에 적극적으로 만류했다. 사업가라면 몸을 사릴 법도 하다. 의혹은 시간이 가면 해결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재철의 생각은 달랐다. “평생 올바른 길을 걸어왔다고 생각하는데 이처럼 말도 안되는 일이 있어서 되는가? 설령 나나 회사가 피해를 보는 일이 있다 해도 시시비비를 가리겠다.”
청문회는 여러 대의 생방송용 카메라가 불빛을 쏟아내고 의혹을 파헤치고 말겠다는 일부 국회의원들의 결의로 뜨겁기만 했다.
김경재 : 사조산업을 죽이기 위해 동원산업이 불법 특혜를 받아 사조를 눌렀다고 생각하는데, 그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김재철 : 저는 어떻게 해서 김의원님이 그런 상상을 하게 됐는지 묻고 싶습니다.
김경재 : 노무현 후보에게 50억 원을 제공했다는 의혹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김재철 : 지금 김의원님이 말씀하신 사항을 제가 설명할 시간을 주시겠습니까? 지난 대선 때 해외에 있었으며 불법정치자금은 한 푼도 준 적이 없습니다.
김경재 : (언성을 크게 높이고 윽박지르듯이) 증인이 의혹의 중심에 있어요.
김재철 : 제가 알기로는 청문회는 들을 청(聽) 자에 들을 문(聞) 자입니다. 증인을 불러서 듣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퍼블릭 히어링“인데 왜 저를 계속 피의자 심문하시듯이 하십니까?
청문회가 끝난 뒤 대다수 언론은 근거 없는 소문을 바탕으로 특정 기업을 공격하는 정치인을 나무라는 의견을 피력했다. “계속되는 추궁에도 김 회장은 시종 단호한 어조로 의혹을 부인해, 두 사람 간 설전은 김 회장의 우세승 양상을 띠었습니다.” “김경재 의원의 폭로는 김재철 회장의 증언을 종합해볼 때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았다.” “김경재 의원은 이날도 의혹을 뒷받침할 증거자료를 내놓지 않았다.”
이 건을 주고 김경재 의원에 대해 명예훼손 고소가 들어가게 되는데, 2004년 4월 21일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 19부(박기동 부장판사)는 김재철의 명예훼손죄 주장에 손을 들어준다. “동원산업 김재철 회장과 동원케피탈(주). (주)동원F＆B가 민주당 김경재 의원을 상대로 낸 30억 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전액 배상하라며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다.” 판결이 있은 이후 같은 해 5월 6일 김경재 의원은 국회에서기자회견을 갖고 동원 측과 국민들에게 사과 성명서를 발표한다. 훗날 김경재 의원은 그의 자서전 『김경재의 꿈과 고백』에서 “그 사건(노무현 대통령에게 50억 원을 주었다는 주장)에 대해 사실 확인을 충분히 하지 못한 채 동원 측이 노 대통령에게 50억 원을 주었다고 주장해 결과적으로 동원산업의 명예에 누를 끼친 것을 유감으로 생각한다”라고 썼다. 또한 그는 이런 요지의 합의문을 쓰고 동원 측이 이를 받아들여 명예훼손과 관련된 소송을 취하했다는 이야기를 더했다.
그는 망망대해에서 사선을 여러 번 넘어서 인생과 사업의 길을 개척해온 사람이다. 대부분 주눅 들 법한 청문회장에서 꼿꼿하게 자기 소신을 피력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고 무엇을 중시하는 가를 고스란히 드러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데 이제 와서 무엇을 두려워해서 비굴해져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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