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록으로 본 이낙연⌟ 연재를 시작하면서…
이낙연은 1987년 대통령 직선제 도입 이후 가장 오래 일한 ‘최장수’ 총리였다. 역대 총리 가운데 국민의 사랑을 자강 많이 받은 ‘최애’ 총리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런 이낙연의 연설비서관으로 2년 개월 동안 지냈던 이제이의 글을 본지는 금년 말까지 연재합니다.
박대출 의원 : 최근에 MBC외 KBS 불공정 보도를 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낙연 총리 : 잘 안 봅니다.
박대출 의원 : 뉴스도 좀 보십시오. 그래야 세상 돌아가고 문 정권이 아니라 국민들이 어떻게 보고 있고를 알 수 있습니다. 민노총 산하의 언론노조가 장악하는 방송, 현 사장이 운영하는 방송 어느 게 더 객관적이겠습니까?
이낙연 총리 : 꽤 오래 전부터 좀 더 공정한 채널을 보고 있습니다.
2017년 9월 11일 대정부 질문
문재인 정부의 첫 국회 대정부 질문이 있던 2017년 9월 11일. 예기치 않은 ‘선수’가 등장했다. 공ㅇ여방송의 불공정 보도를 봤냐는 야당 의원의 날 선 공격에 “꽤 오래 전부터 더 공정한 채널을 보고 있다”라고 정면으로 응수했다. 야당 의원과 총리의 질의응답 장면을 편집한 동영상은 그날 유튜브 등을 통해 퍼져나갔다. ‘사이다’ 총리 등장의 서곡이었다.
물론 2020년 초 지금의 MBC는 이와 다른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당시 이 총리의 발언은 상대의 허를 찌르는 동시에 공영 방송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들었다.
대저우 질문은 정부가 국정 운영을 잘 하는지 국회가 감시하는 제도다. 1948년 제헌헌법과 국회법 제정으로 시작됐지만 70여 년간 전 국민의 관심을 받은 적이 드물었고 관심거리가 된다 해도 그 대상은 주로 야당 국회의원들이었다. 야당 국회의원들이 국무총리와 장관 등을 발언대에 세워놓고 다그치듯 공세를 펼치면 정부측 인사들은 :그 점 시정하도록 하겠습니다.“라면서 두루뭉술하게 마무리하는 게 의례적이었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의 국감에서는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발언대에 서는 이 총리는 답변에 나설 때마다 국회의장과 국회의원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했고, 천천히 걸어 발언대에 섰는데, 사전에 감정을 세팅해 놓은 사람처럼 그는 상대가 아무리 언성을 높이고 감정적으로 건드려도 동요가 없었다. 이낙연 총리의 답변은 점잖았지만 날카로웠고, 겸손하면서 당당했다. 전임자들과 대비되는 이 총리의 태도와 답변에 여당 의원들 사이에서는 이따금 웃음이, 야당 의원들 사이에서는 한숨이 흘러나왔다.
다른 야당 의원들도 박 의원에 이어 공세를 펼쳤지만 이 총리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문재인 정부가 최순실 국정농단의 가장 큰 수혜자라고 일격하자 “국정 농단의 큰 짐을 떠안은 것은 불행으로 생각합니다.”라고 점잖게 답변했다. “한국은 삼권분립 국가가 아닙니다. 제왕적 대통령 1인 국가입니다”라는 말에 “대통령이 지명한 헌법재판소장 등 후보자가 인준 받지 못한 사태가 바로 있었잖습니까. 삼권 분립은 살아 있습니다.”라며 반격했다. 방어를 넘어 고도의 정밀한 역공이었다.
나흘간 이어진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이 총리는 ‘역대 최고급’ 답변으로 존재감을 과시했다. 나중에 전해 듣자 하니 대정부 질문이 있던 다음 날 직장인들이 점심시간이나 휴식시간에 나누는 대부분이 전날 있던 이 총리의 사이다 발언이었단다. 대리 만족이라고 해야 할까. 이 총리는 상대방이 차려놓은 상을 순식간에 회전시켰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고 하지만, 그는 공격하지 않으면서 공격하고 방어하는 듯하면서 공격하는 놀라운 내공을 보여줬다.
일 년 뒤에 열린 대정부 질문에서도 이낙연의 어록은 회자됐다. 2018년 9월 13일의 대정부 질문에서 이 총리는 한국당 친박계 김태흠 의원과 설전을 벌였다. 이날 김 의원은 ‘촛불혁명’이란 표현을 고리로 이 총리를 압박해 들어갔다. 아무리 덫을 놓아도 이 총리가 말려들지 않자 김 의원은 이 총리의 답변 태도를 문제 삼으며 ‘긍정적으로 말하면 노회하고 나쁘게 말하면 구렁이 담 넘어가듯 답한다.“고 지적했다. 그러자 이 총리는 작심한 듯 이렇게 말했다.
“거칠게 표현하는 개 좋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저의 방식은 제가 오랫동안 그려왔던 ‘정치 언어’의 한 부분입니다.”
대정부 질문을 통해 국민은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총리’를 만났다. 새로움의 결정체는 버로 이낙연의 ‘정치 언어’였다. 이낙연의 말은 국민의 귀를 열게 했고, 총리라는 존재를 부각시켰다. 낡고 저급한 정치 언어에 질려버린 국민은 환호했다.
그러면 그가 ‘오랫동안 그려왔던’는 정치 언어란 물까? 이낙연이 빚어낸 정치 언어에는 크게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이낙연의 정치 언어는 구어체다. 그는 들어서 바로 이해가 되도록 쉬운 입말을 쓴다. 한 TV 방송 토론 프로그램에 출연했을 때 이 총리는 ‘영업 비밀’ 하나를 알려주겠다고 하면서 대정부 질문을 보고 있는 국민을 심판관으로 생각하며 어떻게 말하는 게 알아듣기 쉬울까를 고민한다고 했다. ‘먹물 언어’는 듣는 쪽에서 한 단계 걸려야 알아듣지만 입말은 그대로 귀에 들어온다. 그러면서도 격조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은 간단치 않다.
둘째, 그래서 이낙연의 정치 언어는 품격 언어다. 내용도 탄탄하고 말하는 태도는 품위가 있다. 게다가 목소리는 듣기에 좋은 중저음이다. 어릴 때부터 ‘생영감’이라 불릴 정도로 목소리가 낮았는데, 라디오를 들으며 아나운서가 뉴스를 전달할 때의 어조를 흉내 냈다고 한다. 이렇게 단련된 총리의 내공 있는 언어는 문재인 정부에게 안정감을 심어주었다.
대통령도 신사고, 총리도 신사다. 정치적 반대자들이 꼬투리를 잡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잘못 하면 헛발질이 되거나 자살골이 되기 십상이다. 야당으로서는 ‘넘사벽’ 상대를 만난 셈이다.
그 외에 이 총리는 우리말을 제대로 쓰기 위해 오래전부터 의식적으로 노력을 기울여왔다. 코드, 로드맵, 워크숍처럼 흔히 쓰이는 영어도 쓰지 않고, 우리 말 발음 또한 정확하다. 사투리 억양의 흔적도 없어서 그의 고향을 짐작하기가 쉽지 않다. 전주 출신인 부인도 그것이 궁금해서 연애하던 시절에 슬쩍 물어보았단다.
“제가 신기해서 어떻게 사투리를 전혀 안 쓰냐고 물었더니 ‘책을 많이 읽어서 그렇다고 해요. 자신이 쓰는 말은 서울말이 아니라 표준어라면서 책에서 본 대로 표준어를 쓰고 있다고 하는 겁니다. 결혼해서 살아보니까 정말 그렇더라고요. 책을 많이 읽고 책에 쓰는 표준어로 말한다는 말이 정말이었습니다.”
그 사람의 언어는 그 사람을 보여준다. 누군가의 정치 언어는 그 사람의 정치적 정체성과 지향점을 대변한다. 진흙탕 같은 정치판에서 이낙연은 국민을 바라보며 자기만의 정치 언어를 빚어왔고, 그의 언어는 저열한 언어의 늪에 빠진 정치를 일으켜 새로운 희망을 보여주었다.
글: 이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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