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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와 부끄러움 사이에서
학생 독립운동의 진원지이자 저의 모교인 광주제일고등학교 교정에는
광주 학생독립운동 기념탑이 자랑스럽게 서 있습니다.
기념탑에는 이렇게 새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피 끓는 학생이다. 오직 바른 길만이 우리의 생명이다.”
저는 이제 피 끓는 학생은 아닙니다. 그러나 기념탑의 그 글귀는
학생 때와 똑같이 지금도 제 심장에 뛰고 있습니다. 세월이 더 흘러도
기념탑의 그 스물네 글자는 두고두고 제 가슴에 살아 숨 쉴 것입니다.
(2018년 11월 3일 제89주년 학생 독립운동 기념식 기념사)
이낙연은 언젠가 ‘자신의 삶이 행운으로 가득하다고 생각한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부모님이 가난이나 성장기 시절의 굶주림도 오히려 축복이었다고 믿는다면서, 광주일고 진학도 그런 행운 가운데 하나라고 했다.
동문은 흔히 ‘일고’라고 줄여 부르는데, 광주일고 정식 명칭은 광주제일고다. 호남의 최고 명문으로 3·1운동 이후 최대의 항일운동으로 꼽히는 광주 학생독립운동(1929년)의 발원지라는 상징성을 갖고 있다. 이낙연은 이 학교의 45회 졸업생이다.
전남 영광의 벽지에서 광주로 유학온 이낙연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진중했고, 어른스러웠다. 김대중 정부에서 활동했던 조순용 전 청와대 정무수석은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까지 다닌 친구로서 이낙연의 십대 시절을 이렇게 기억한다.
“집에 이낙연을 데리고 가면 부모님이 참 좋아하셨어요. 워낙 이 친구가 공부도 잘 하고 소탈하고 착하니까요. 그 시절에는 매달 모의고사 같은 시험을 치고 나서 석차를 적어 방 붙이듯이 공개했는데, 제 기억에는 이낙연은 거의 1등이었어요. 늘 조용했지만, 신문을 읽고 친구들과 대화 중에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하기도 했어요.”
고3 때 담임이었던 김정수 선생님의 기억에도 이낙연은 과묵했지만 친구들에게 뭔가 영향력을 주었던 학생으로 남아 있다.
“공부를 잘 하면서도 학생회장도 반장도 하지 않았어요. 그러나 친구들 사이에서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 때 조용하게 설득하는 역할을 맡아왔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때에도 참 논리정연 했어요. 수업 중에 질문하면 핵심을 간파해 대답해서 놀랄 때가 많았습니다. 당시 국어시험의 예문을 교과서에서만 낼 수 없어서 잠시 <사상계> 등에 발표된 글 중에서 발췌해 시험 문제를 만들곤 했는데, 학생들은 그걸 어려워했거든요. 그런 문제도 이낙연은 잘 맞췄어요.”
언젠가 대정부 질문에서 이 총리는 “저도 국어 꽤 했습니다.”라고 대답했는데, 이런 이력이 있던 것이다. 어떤 선생님은 국어시험 문제를 내면서 이낙연이 틀리는 문제를 내려고 애썼다고 한다. 김정수 선생님의 연이은 회고다.
“청소 검사하러 교실에 가보면 당번들이 다 도망가고 혼자 남아서 교실 전체를 청소하는 친구가 있어요. 이낙연 혼자서 책상 옮기고 빗자루질을 하는 겁니다. 왜 너 혼자냐 하면 ‘저라도 해야지요.’ 특유의 저음으로 얘기하면서 청소를 해요. 심대에 목소리가 묵직했어요. 3학년 교과서에 실린 첫 글이 ⌜기미독립선언문⌟인데 한번 읽어보라고 했더니 ‘오등吾等은 자玆에 아조선我朝鮮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낭독하는데 그 음성이 참 잘 어울렸던 게 기억납니다.”
이낙연은 책을 좋아했고, 글쓰기를 좋아했다. 신문을 보고 좋은 사설은 베껴 적었고 매일 일기를 썼다. 일기장이 쌓이면 집으로 들고 왔는데 우연히 형의 일기를 훔쳐보게 됐다는 동생 이계연은 그 중의 한 구절을 기억한다.
“‘내 몫으로 한 방울의 피도 남기지 않겠다.’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가 했어요. 피 한 방울도 안 남을 만큼 치열하게 살겠다는 뜻이었겠지요. 그 나이에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는지, 형은 십 대부터 그렇게 온힘을 다해 살았어요.”
고등학교 친구 정호경은 오래전 추억 하나를 소환해 냈다.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는데, 시골 출신으로 여덟 명 정도가 ‘한길회’라는 클럽을 만들었어요. 방과 후에 교실에 앉아서 이런저런 토론도 하고 그랬어요. 한 번은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가 주제가 되었어요. 여러 얘기가 오갔는데, 그때 우리가 내린 결론은 ”양심에 거리낌 없이 깨끗하고 정의롭게 살다가 죽을 때 웃으면서 죽을 수 있다면 잘 산 인생이지 않겠느냐“는 거였어요. 아이들이 조숙하기도 했지만 학교 분위기가 그랬습니다. 학생탑의 영향이 컸고 졸업한 뒤에도 학생탑에서 만나 이런 얘기를 나눴어요.”
사춘기 이낙연을 그려보면 그가 감명 깊게 보았다는 ⌜윤동주 평전⌟의 윤동주 그림자가 겹쳐진다. 시인 윤동주의 삶에 깔려 있는 정서는 부끄러움이다. 나라를 잃고 시인은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라고 적었다.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라는 표현에는 아직 인생을 제대로 살아본 적이 없다는 겸손이 담겨 있다. 십대 청소년 시절의 이낙연이 삶을 고백했다면 이와 비슷한 참회록을 쓰지 않았을까.
이낙연이 고3 때인 1969년. 극회에서는 3선 개헌안이 날치기로 통과되고 이에 저항하는 대규모 학생시위가 시작됐다. 한국 사회는 박정희 장기독재에 민주주의가 질식할 위기에 내몰리고 있었다. 이럴 때 십대의 이낙연은 어떤 생각을 하며 보냈을까. 나는 그가 총리가 되어 광주일고 동창회보에 썼던 글에서 실마리를 얻을 수 있었다.
“우리는 피 끓는 학생이다. 오직 바른 길만이 우리의 생명이다. 시골에서 지란 남무한 소년에게 학생탑의 ‘소리 없는 함성’은 다시없는 위안이고 꿈이 돼 주었습니다. 외롭고 배고팠던 시골뜨기 소년은 학생탑의 이 외침으로 위안 받았고, 도리어 큰 꿈을 꿀 수 있었습니다. 학생탑의 짧은 외침은 생애에 걸쳐 가장 큰 스승이 됐습니다.” (광주일고 동창회보 2017년)
글: 이제이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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