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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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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웅 칼럼니스트와 세상 사는 이야기 – 사랑
역사의 갈피 속에 숨겨진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

조상들의 사랑했던 사람을 그리워하며 쓴 도망문悼亡文

 

사람과 사람 사이는 관계를 맞고 산다. 관계 속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온유하고 배려가 있다. 그를 위한 희생도 필요하다. 그것은 그를 위한 가장 소중한 존재로서 바라보아주는 것이다.

조상들은 그런 사랑을 어떻게 이루어 갔을까? 하는 면에서 바라보는 시간을 살펴보자. 그러한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여기서는 문학적 요소를 가지고 살펴보면 하는 생각이다.

 

조상들의 사랑했던 사람을 그리워하며 쓴 도망문(悼亡文)

심노숭의 도망문悼亡文에서 나타나는 아내는, 일반적으로 제문祭文이 기능하는 망자에 대한 위안혹은 자기 위안이라는 단선적 측면에서 접근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심노숭 도망문의 구현 방식 등의 특징을 분석하여 궁극적으로 심노숭이 그토록 많은 망실문을 통해 아내의 죽음을 애통해할 수밖에 없었는지 알아본다.

심노숭의 도망문은 공적 기능을 담당했던 상용 제문이 아닌, 감정을 내포한 일종의 사적 문학으로 변용하여 쓰였다. 심노숭의 도망문은 아내를 위한 편지의 일종으로써 망자를 위한 글이나,

망자에게 중요한 기억이었을 것이리라 추정되는 기록물이다. 따라서 심노숭의 망실문은 죽은 아내의 입장을 최대한 반영하면서도, 자신과 조우 되는 차원의 슬픔을 주로 기술한다. 이러한 복합적 발화 방식은 종내 심노숭이 자신에게 내재 되어있는 극한의 고통을 치유하기 위한 글쓰기와 연결된다.

심노숭에게 형상화된 아내는 우도友道의 측면에서 이해된다. 아내는 지우지감知遇之感을 느끼게 하는 자질을 지닌 자였다. 심노숭의 아내는 기질적으로 현묘하였으면서도 정치적으로 고단했던 남편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있는 지기知己이자 정신적 동반자였다.

그녀를 잃은 상실감은 어떤 것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것이었다. 심적 고통은 육체적 고통으로 이어지게 되고, 심노숭은 그를 극복하는 유일한 수단으로 아내를 복원시키는 글쓰기를 선택하기에 이른다.

 

 

심언광(沈彦光, 1487-1540)이 꿈에 죽은 아내를 만난 뒤 쓴 몽망처(夢亡妻)

 

도망문(悼亡文), 즉 죽은 아내를 생각하며 지은 글이다. 글 마디마디마다 평생 고생만 하다 죽은 아내를 향한 미안 함과, 살아 잘해주지 못한데 대한 회한이 가슴 저미게 스며 있음을 본다.

심언광(沈彦光, 1487-1540)이 꿈에 죽은 아내를 만난 뒤 쓴 몽망처(夢亡妻)란 작품이다.

이를 통해 알아보자.

十口常資二頃田 貧家生理賴妻賢

십구상자이경전 빈가생리뢰처현

艱辛契活曾三紀 榮顯功名僅數年

간신계활증삼기 영현공명근수년

自謂與君同白首 何先棄我落黃泉

자위여군동백수 하선기아락황천

魂來不覺冥途隔 夢裏溰巾尙宛然

혼래부각명도격 몽리기건상완연

 

열 식구 두 뙈기밭 의지해 사니

가난한 집 살림살이 자네 어짐 덕이었네.

간신히 먹고 산 지 서른여섯 해

공명을 누린 것은 겨우 몇 해뿐.

흰머리 되도록 함께 살자 했더니

날 두고 어이 먼저 황천 가셨나.

넋이 오매 저승길이 막힌 줄 몰랐더니

꿈속에선 평소 모습 완연히 그대로라.

 

꿈을 꾸다 꿈길에서 죽은 아내를 만났다. 생시의 모습이 완연하여 죽은 사람인 것도 잊었더니 깨고 보니 허망한 꿈이다. 열 식구 큰 살림에 평생 고생만 하다가 뒤늦게 열린 벼슬길에 이제 겨우 먹고살만 하니까 아내가 훌쩍 세상을 떴다. 이젠 살만해 졌으니 건강하게 흰머리로 백년해로 하자던 묵은 약속이 허망하여 그는 자꾸만 울음을 그치지 못한다.

 

배소만처상(配所輓妻喪) 추사 김정희

 

聊將月老訴冥府 來世夫妻易地爲

료장월로소명부 래세부처역지위

我死君生千里外 使君知有此心悲

아사군생천리외 사군지유차심비

 

월하노인 통하여 저승에 하소연해

내세에는 남편 아내 바꾸어 태어나리.

천리 밖서 나는 죽고 그댄 살아서

이 마음의 이 슬픔을 알게 하리라.

 

만년에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에서 유배 생활을 하고 있을 때, 서울 집에서 아내의 부고가 날아들었다. 귀양살이에 지친 남편에게 편지와 옷가지를 보내며 집안 대소사를 알뜰살뜰 챙기던 아내, 평생 그늘에서 애만 태우던 그녀의 일생을 돌이키며 추사는 견딜 수 없는 자책감과 슬픔에 빠져들었다. 정작 평생의 고락을 함께 했던 아내의 죽음 앞에, 가서 곡 한 번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참으로 참담하였다.

그래서 그는 남녀의 인연을 맺어준다는 월하노인月下老人을 찾아가서, 내세에는 부부의 역할을 바꿔서 다시 한번 만나게 해줄 것을 하소연하겠다고 했다. 단지 내세에도 부부로 다시 만나자는 허망한 다짐을 두려 함이 아니다.

그때도 천리 밖 멀리 서로 떨어져 있다가 이번에는 반대로 내가 먼저 죽고 당신은 살아서 지금의 이 내 참혹한이 마음의 이 슬픔을 알게 하리라. 당시 추사의 처연한 슬픔을 느낄 수 있다.

 

 

月下老人월하노인

진서(晉書)예술전(藝術傳)과 속유괴록(續幽怪錄에 나오는 이야기

 

당나라 초기, 정관(貞觀) 2년에 위고(韋固)라는 청년이 여러 곳을 여행하던 중에 송성(宋城:지금의 허난성(河南省)에 이르렀을 때 어느 허름한 여관(客店(객점旅館))에 묵게 되었다.

그날 밤 달빛 아래 웬 노인이 큼직한 책을 뒤적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위고가 다가가 묻자 노인이 말했다.

 

"나는 지금 세상 사람들의 혼보(婚譜 남녀간의 혼인을 기록한 책)를 보고 있네.

그리고 이 붉은 실(赤繩)은 부부를 맺어 주는 끈이지.

내가 두 사람의 발을 묶기만 하면 결국에는 부부(夫婦)로 결합하고 말지."

위고는 노인의 말이 하도 신기해 그를 따라 나섰다.

싸전 거리를 걸어 나서는데 웬 장님 로파(老婆)가 세살짜리 여자 아이를 안고 더듬거리며 지나갔다.

그 때 노인이 불쑥 말했다.

"장님이 안고 있는 저 어린 여자애가 장래 자네의 부인이 될 걸세."

위고(韋固)는 어이가 없었다. 혹시 이 놈의 영감이 장난을 치는 게 아닐까 싶어 지나가던 가노(家奴)를 시켜 여자애를 찔러 죽이게 했다.

14년 후 위고(韋固)는 상주(常州) 자사(刺史) 왕태(王泰)의 딸과 결혼하게 되었다.

열 예닐곱 나이에 뛰어난 미모(美貌)를 갖추었지만 얼굴에 흉터가 있는 것이 흠이었다.

어느 날 문득 예전 생각이 나 부인에게 월하노인의 말을 이야기 해주고

위고(韋固)가 흉터에 대해 묻자 그녀가 말했다.

그러자 부인은 깜짝 놀라면서 말하였다.

"14년 전의 일이지요. 장님 보모(保姆) 진씨 할머니가 저를 안고 송성(宋城)의 싸전 거리를 걷고 있는데 갑자기 웬 미치광이가 저를 찌르고 달아났지요."

"저는 사실 태수의 친딸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송성에서 벼슬하시다가 돌아가시자 유모가 채소장사를 하면서 길러주었는데 지금의 태수께서 아이가 없자 저를 양녀로 삼으신 것입니다."

깜짝 놀란 위고(韋固)는 자초지종(自初至終)을 이야기해 주었다.

물론 두 사람은 금실 좋게 百年偕老(백년해로)했다고 한다.

이 때부터 月下老人(월하로인)'중매쟁이'라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약칭 '월로(月老)'라고도 한다. 월하노인의 붉은 실은 죽음으로도 끊을 수가 없다고 한다.

 

순박한 시골 처녀의 순정을 그린 정섭鄭燮-죽지사竹枝祠 이야기

 

湓江江口是奴家 郎若閑時來吃茶

분강강구시노가 낭약한시래흘다

㣴土築牆茅蓋屋 門前一樹紫荊花

황토축장모개옥 문전일수자형화

 

분강 들머리에 소녀의 집 있사오니. 낭군께서 한가할 때 오시어 차 한잔 하시지요

진흑으로 담쌓고 띠로 이은 집이지만. 문앞 한 그루 박태기나무에 꽃이 피었답니다.

정섭의 시사십오수묵적(詩祠十五首墨迹)에수록 되어있는 시다 순박한 시골 처녀의 순정을 표현한 글이다.

 

정섭(鄭燮1693-1765)은 강소성 흥화(江蘇省 興化) 사람으로 자는 극유(克柔) 호는 板橋(판교)이다. 그는 4세 때에 어머니를 잃고 유모와 고모의 슬하에서 가난과 고통으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총명하였을 뿐 아니라 서화(書畵)에 뛰어나 청년기에는 그림을 팔아서 스스로 생활하였다. 강희(康熙)와 옹정(雍正) 연간에 수재와 거인을 거쳐 건륭(乾隆) 원년(1736) 44세에 진사에 급제하였고 산동범현, 유현(山東范縣, 濰縣) 등의 현감을 역임하였다.

정섭(鄭燮)은 가난을 벗어나기 위한 방편으로 관직 생활을 하였으며 음주와 가무를 좋아하였으나 백성들에게 훌륭한 관리로 칭송될 정도로 직무에 충실하였다. 그러나 소탈하고 솔직하면서도 괴팍한 성격으로 상관들에게는 항상 미움을 샀으며 그로 인해 결국 관직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그후 그는 강희수재(康熙秀才), 옹정거인(雍正擧人), 건륭진사(乾隆進士)’, ‘속이(俗吏)’, ‘칠품관이(七品官耳)’ 등의 인장을 사용하여 관직 생활에 대해 자조(自嘲)하였으며 미련을 가지지 않았다.

 

허난설의 竹枝詞

家住江陵積石磯

가주강릉적석기

門前流水浣羅衣

문전유수완라의

朝來閑繫木蘭棹

조래한계목란도

貪看鴛鴦相伴飛

탐간원앙상반비

집은 강릉 땅 돌 쌓인 강가에 있어. 문 앞을 흐르는 물에 비단옷 빠네.

아침이면 한가로이 노 매어 두고. 짝지어 나는 원앙새 넋을 잃고 바라보네.

 

정관웅

강진고을신문논설주간

힐링코칭상담연구소장 시인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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