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암 정약전이 서세하신지 200주년이 되는 해다. 정약전은 다산 정약용이 스승처럼 여기며 존경하던 형이면서도 당대의 뛰어난 학자로 알려져 있다.
정약전은 유배생활을 하기 전 다산과 많은 시간을 보냈는데, 학문을 논하기도 하고 산천을 유람하면서 때론 스승처럼 때론 벗처럼 지냈다. 아버지 정재원이 화순현감으로 있을 때 둘은 동림사(東林寺)란 절에 가서 매일 책만 읽었다. 공부를 할 때 다산은 오묘한 문장이 나올 때마다 정약전에게 묻곤 했는데, 그때마다 정약전이 자상하게 가르쳐주어 공부의 재미를 만끽했다.
“형님. 부모 말 안 듣고 처자식까지 내팽개쳐가며 중살림을 하는 스님들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것 같습니다. 그들은 고기도 먹지 않고 술도 마시지 않으며 특히 여색(女色)을 멀리하니 사는 재미라곤 일체 없을 것 같았는데, 이제야 알 것 같은 것은 어떤 것과 비교할 수도 바꿀 수도 없는 자기만의 즐거움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형님과 제가 학문하는 즐거움을 느끼고 있는데 또 다른 즐거움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정약전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약전과 다산은 그렇듯 학문을 함께 했고, 다산의 권유로 벼슬길에 오른 뒤에도 두 사람은 형제애를 돈독히 쌓아 갔다. 벼슬생활의 바쁜 일정에도 다산은 고향에 내처 내려가 정약전과 함께 강가에서 그물을 쳐 고기를 잡았는데, 한번은 어찌나 많이 잡았던지 뱃전에 물이 넘어올 듯 했다. 배를 옮겨 다른 곳으로 가 배불리 먹고 나서 천진암(天眞庵)으로 가 술과 함께 시를 지었는데 20여 수나 되었다.
그런 다산 형제가 생이별의 처절한 유배 생활을 하게 된 것은 천주교 때문이었다. 다산의 집안에서 철저히 천주를 신봉하는 신자가 나타난 것은 바로 다산의 바로 손위 형이 되는 선암(選菴) 정약종(鄭若鍾)이었다. 아버지를 따라 북경에 간 이승훈(李丞薰)이 40일 동안 교리 공부를 하고나서 귀국 후 이벽(李蘗)과 함께 최초의 천주교 신자가 되었으나, 이벽이 일찍 세상을 뜨게 되자 정약종이 그 뒤를 이은 것이었다. 정약종은 다산의 장형인 정약현의 사위도 되고 조카사위도 되는 황사영(黃嗣永)을 전도하게 되었는데, 이를 받아들인 황사영은 좋은 가문의 출신임에도 열렬한 천주교 신자로써 참된 신앙인의 길을 걸어 나갔다.
그러나 어린 순조를 대신하여 수렴청정을 하는 정순대비가 추상같은 법령을 반포하기에 이르렀다. 1801년 1월 10일, 정순대비는 ‘오늘날 사학(邪學 천주교)이라 일컬어지는 것은 아비도 없고 임금도 없으니 인륜을 파괴하고 교화에 배치되어 저절로 짐승이나 이적(夷狄)에 돌아가 보인다’며 ‘엄하게 금지한 뒤에도 개전의 정이 없는 무리들은 마땅히 역률(逆律)에 의거하여 처리토록 하고 마땅히 코를 베어 죽여서 씨도 남지 않도록 하라’고 역적죄로 몰았다.
정약종이 천주교 관련 자료를 숨겨 옮기다 들통이 나는 바람에, 공소파 일당은 이른바 서급(書笈) 사건이라고 부르는 절호의 기회를 놓칠까봐 반대파인 신서파를 일망타진할 계획을 세웠다. 그로 인해 아우구스티노 정약종은 장렬히 순교했다. 베드로 이승훈, 토마스 최필공, 프란체스코 사베리오 홍교만, 루가 홍낙민, 요한 최창현 등과 함께 서소문 밖에서 참수형을 당했는데, 다산과 정약전만이 목숨을 건져 다산은 경상도 장기현으로, 정약전은 강진현 신지도로 유배를 떠났다.
그런데 그해 9월 황사영은 여섯 명의 초창기 대표적 신자들이 참수를 당하자 쫒기는 몸이 되어 충청도 제천의 한 토굴에서 지냈다. 이때 그를 찾아온 황심(黃沁)이란 신자와 의논을 한 끝에 조선에서 일어나고 있는 천주교의 핍박을 북경의 주교에게 알리려 했다. 그래서 그는 신유옥사의 사건으로 여섯 명이 참수형을 당했던 내용을 명주 비단 폭에 1만 3484자를 적어 내리니, 그것이 그 유명한 ⌜황사영 백서⌟였다.
‘이 글만이 천주학이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일 것이야.’
황사영은 먼저 세상을 떠난 윤지충, 이승훈, 이벽, 정약종 등 많은 신도들의 이름과 활동을 나열 한 후, 당쟁으로 인해 천주학이 박해를 당하고 있다는 점을 밝혔다. 그리고 천주교에 대한 신심(信心)이 이 정도인데도 가혹한 탄압을 이길 수 없으므로 중국황제를 알현하여 조선에 대한 압력을 가해 줄 것과, 천주교를 신봉하는 유럽의 군함을 파견하여 조선을 압박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제 더 이상 천주학 신도들이 박해를 당하지 않고 신앙의 자유를 얻게 해달라는 내용의 백서는, 북경으로 가는 일행 중 한 사람이었던 옥천희(玉千嬉)가 옷 속에 지니고 떠났으나 북경의 주교에게 전달하기 전 한 배교자의 배신으로 인해 들통이 난 사건이었다.
이로 인해 황사영은 능지처참을 당했고, 그의 모친은 거제도로, 부인 정난주는 제주도로 유배되고 말았다. 만삭의 몸으로 제주도를 가던 정난주는 풍랑에 의해 조산을 하게 되었는데, 추자도에서 몸을 푼 그녀는 갓난아이를 제주도로 데리고 가면 죽여 버릴까 봐 족보와 함께 포대기에 싸서 갯바위 위에 놓고 떠났다.
황사영은 머리가 천재적이어서 16세의 어린 나이에 진사(進士) 시험에 합격한 인물이었으나, 높은 수레를 타고 비단옷을 입은 채 대궐 문을 드나드는 출세의 길 열복(熱福)을 추구하기 보다는 천주님에게 귀의하여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천주신자로 살기를 원했다. 세상사에 대한 관심을 끊고 오직 천주님만을 생각하고 천주신자들과 왕래하며 사는 것에 즐거움을 느끼는 청복(淸福)의 길을 택했던 것이다.
정약전과 다산의 유배 생활
정약전과 다산 두 형제는 황사영 사건으로 다시 국문을 받았다. 그러나 아무 증거가 없었기 때문에 간신히 목숨은 구할 수 있었지만 다산을 아예 죽이려는 세력 때문에 고초가 더 클 수밖에 없었고, 결국 정약전은 흑산도로 다산은 강진현으로 유배지가 바뀌었다.
다산은 강진으로 유배 온 후 처음 동문 밖 주막집에서 지냈을 때 스스로 사의재(四宜齋)란 서당 간판을 달고 새 의지를 다졌다. 생각은 담백하게 하고, 외모는 장중하게 하며, 말은 과묵하게 하고, 몸가짐은 무겁게 하겠다는 다짐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유배생활이었다.
다산은 정약전 형을 늘 그리워하면서 서신을 보내곤 했다. 얼마나 그리워했으면 정약전 형이 꿈에 나타나기까지 했을까.
……구월 구일 꿈에 둘째 형님이 내게 말하기를 ‘구일 날 우이봉 정상에 올라가 강진을 바라볼 터인즉 아우도 높은 곳에 올라 서로 바라보면 정신이 서로 만나겠지’ 하셨다. 아침을 먹고 보은산 정상에 올라갔을 때 중 근은(謹恩)이 함께 동행을 하였다. 그런데 정상에서 술을 마시며 서쪽을 바라보았을 때 바다에 산들이 섞여 있고, 구름 속에 보일 둥 말 둥 하면서도 나주의 여러 섬들이 대체로 눈앞에 역력했다. 다만 어느 것이 우이도인지 분간이 잘 되었다.
이때 근은이 이렇게 말했다.
‘이 산을 우이산(牛耳山)이라고도 하고 정상의 두 봉우리를 형제봉(兄弟峯)이라고 합니다. 강진의 지세가 와우형국(臥牛形局)이다 보니 우이산이라 부르고 있고, 봉우리가 나란히 두 개다 보니 형제봉이라고도 부르고 있습니다.’
나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서로 바라보면 둘 다 우이산 정상이고 봉우리 이름 또한 형제봉이어서 역시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였다. 사람 사는 인생이 떠돌고 머무는 것이 모두 정해져 있는 것 같아서 서글픈 마음에 돌아와 시를 지어 둘째형님에게 부쳤다.
다산과 정약전 두 형제의 우의를 느끼게 하는 일화가 아닐 수 없다.
한편, 정약전은 절해고도 흑산도에서 지내면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사촌서당(沙邨書堂)의 아이들 시에 차운한 시가 있다. ⌜차아배신기운(次兒輩晨起韻)⌟이 그 제목인데 서당 선생으로서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유리 같은 하늘에 반짝이던 별 드물어지고 琉璃天色?星稀
닭울음소리 세 번 들려오니 옷 입고 일어나네.三度鷄鳴起整衣
엄격한 과정 배우려면 느슨하게 할 수 없으니 只爲嚴程鬆不得
가물거리는 등잔불로 아침 햇살 기다리네. 一燈殘焰待朝暉
그런 정약전에게 다산은 <사촌서당기 沙村書堂記 :복성제 復性齊)>를 지었다.
--누에 기르는 농가에는 여러 개의 잠박(누에채반)을 갖고 있다. 대규모로 기르는 집은 온 집안에 가득하게 잠박을 둘러놓고 작게 기르는 집은 방 사분(四分)의 일(一)쯤 되게 잠박을 놓아두기도 한다. 어떤 집은 방 하나를 정(井)자 모양으로 나누어 그 한구석에서 시집올 때 가지고 온 폐백상자를 사용하게 해서 기르면서도 여유 있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지나가며 보는 사람들이 많이 기르는 집은 부러워하고 폐백상자에 기르는 집을 비웃지 않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지혜 있는 부인이 잘 자란 뽕잎을 구입해서 제대로 길러 세 잠 잔 후 다시 성숙되어 실을 토해서 누에고치가 만들어지면 여기서 뽑아낸 명주실은 많이 기른 농가의 누에고치와 다를 바 없다.
스프다. 어찌 누에뿐이리오. 온 세계가 잠박이다.
하느님이 여러 섬에 사람들을 나누어 놓은 것과 똑 같다. 우리 인간은 섬(島)을 잠박으로 여기며 살아간다. 큰 섬은 적현(赤縣:지금의 중국)과 대하(大夏:지금의 인도)가 되고 작은 섬은 유구(日本琉球)가 되고 아주 작은 섬은 추자도(楸子島), 흑산도, 가가도(可佳가거도) 등이 되어 있다. 지나가며 보는 사람들이 큰 섬을 부러워하고 작은 섬을 비웃는 것은 잠박에서와 같다.
그러나 학문이 있고 덕망이 있는 큰 학자가 있어 옛 서적을 구독해 놓고 법대로 가르치고 올바른 길을 인도하며 글 짓는 것과 세상 다스리는 학문을 닦아 몸에 덕(德)이 쌓고 과거에 급제하게 된다면 작은 섬사람들이 큰섬에 사는 사람들과 다를 바 결코 없을 것이다.
내 형 손암 선생이 흑산도 귀양살이 하신지 7년이 되어 5-6인 아이들이 따르며 사서(四書)와 역사를 배우게 되어 두세 칸을 지어 사촌서실(沙村書室)이라 이름 쓰고 내게 서당기(書堂記)를 지으라 하시기에 누에채반을 비유로 이곳에서 글 배우는 아이들을 깨우쳐 준다.
순조(純祖) 7년(1807년) 여름 정약용 씀.
정약전은 유배생활을 하면서 자산어보(玆山漁譜)를 지었다. 비닐이 있는 어류(鱗魚類)와 비닐이 없는 어류(無鱗魚類), 개류(介類)와 잡류(雜類)로 나누어서 흑산도의 물고기를 차례로 엮어냈다. 비닐이 있는 어류는 석수어, 숭어, 농어, 도미류, 준치, 고등어, 청어, 상어, 금처귀, 어구어, 손치어, 넙치가자미, 망치어, 망어, 날치, 노래미, 전어, 병어, 멸치, 정어리 등이었고, 비닐이 없는 어류는 가오리, 해만리, 대광어, 해점어, 복전어, 오징어, 문어 등이었다. 개류는 거북, 게, 전복, 조개, 굴, 고둥, 밤송이조개 성게, 개부전 불가사리 등이었다. 잡류는 해충, 바다물새, 해수, 해초, 가산호 등이었다.
정약전은 흑산도에서 유일하게 책을 읽는 장창대란 소년과 가까이 지냈는데, 자산어보를 만들 때에도 장창대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정약전은 그런 장창대를 두고 이렇게 평했다. ⌜장창대에게 부치다 寄張昌大⌟를 보면,
사람들은 장창대를 두고 人設張昌大
남들보다 뛰어난 선비라 하네. 迢迢逸士林
옛 책을 언제나 손에 들고 古書恒在手
오묘한 도가 마음에서 떠나지 않네. 妙道不離心
초저녁부터 얘기를 나누다보면 忽忽初更話
어느 새 바다 소리가 들려온다네. 悠悠隔海音
어찌하면 한낮부터 밤이 다하도록 何當窮日夜
이치의 근원을 같이 더듬어 볼까. 到底理源深
하고 지었다. 또 다른 시는 ⌜장창대에게 주다 贈張昌大⌟이다.
나주 바다 서남쪽에 한 선비 기이해서 羅海西南一士奇
평생 본 적 없으나 서로 마음 알았네. 生無 0面兩心知
엄자릉처럼 인간사 지푸라기처럼 여겨 嚴陵視0人間事
동강에 물러나 낚싯줄이나 손질하네. 却向桐江理釣0
엄자릉은 광무제(光武帝)의 학당 친구였는데 광무제가 천하를 통일한 후 여러 차례 불렀으나 부춘강의 상류인 동강에서 낚시하며 지냈다는 고사까지 언급하며 장창대를 추켜세웠다.
정약전은 그렇게 지내면서 다산에게 편지를 보냈다.
미용(다산의 자)이 강진에 유배된 지 5년이 되었는데, 춥고 덥기가 북쪽 지방보다 덜한 것을 보고 예전에 풍토병이 심한 고을이라고 들었던 것과 크게 다르다는 것을 느끼고 지내네. 아마도 그대가 흑산도엘 와보지 않아서 그저 강진이 살기 좋은 고장이라 생각하고 있는 것 같네.
당나라나 송나라 사람들은 죄인을 유배 보낼 때 반드시 오령(五嶺 중국 남방의 다섯 고개)의 남쪽 큰 바다 가로 보냈다지. 조선 사람들은 실제를 버리고 힘써 중화(中華) 흉내 내기를 좋아하므로 조선 땅 남쪽의 여러 섬이 여기에 해당된다고 여긴 모양일세.
내가 살고 있는 흑산도는 세상에서 말하기를 “가장 멀고 살기 힘든 곳”이라고 한다네. 세상에서는 중화인이 “오령의 남쪽, 큰 바닷가에는 이른바 ‘장려지독(瘴려之毒)’과 ‘복사지해(蝮蛇之害)’와 ‘맹풍괴우지재(盲風怪雨之灾)가 있다고 쓴 것을 보고는 당연히 흑산도도 그럴 것이라 여겼다네.
더구나 흑산도로 유배된 자는 ‘감사죄일등(減死罪 一等)이라 하였으니 비록 조선의 북계(北界)가 중국 연(燕) ‧ 대(代) 지역과 같은 위도(緯度)임을 모른다 하여도, 조선의 가장 남쪽이라고 해봐야 연(燕) ‧ 대(代) 지역의 남쪽 수천 리 땅에 겨우 닿을 뿐이네. 중국 오령의 남쪽 지방과 비교했을 때 사오천리나 북쪽에 있으니 어찌 멀고도 살기 힘든 땅이라 할 수 있겠는가?
그러고 보면 강진은 참으로 살기 좋은 고장으로 토(土)의 위치에 있고, 흙의 성질이 견고하기에 껄끄럽고 먹혀 있어 추위와 더위가 모이는 것이니, 이는 물건에 기름이 끼면 엉겨서 떨어지지 않는 것과 같고, 사람에게 있는 토기(土氣) 또한 사납다 할 수 있을 것이네.
강진에 비해 흑산도는 수(水)여서 물의 성질이 기(氣)에 가까운지라 부드럽고 가볍고 맑아 추위와 더위가 오는 것이 마치 바람이 불면 사물이 굳어있을 수 없는 것과 같네. 또 맑은 바람이 지나가도 막힘이 없으니 밝은 기운이 펼쳐지며 추위와 더위를 모두 이겨내기에 넉넉하네. 여름 날에도 칡베옷을 거의 입지 않고 겨울날에도 서리나 얼음을 보기 힘드는데 강진도 그러한가 모르겠네.
더럽고 독한 것이 쌓이지 않아 샘물은 맑고 차가우며, 오래 비가 와서 어둡고 안개가 끼더라도 풍토병이 생기는 게 아니라네. 더구나 세상과 떨어져 있다 보니 교만이며 사치며 음란과 방일, 절도와 갖가지 악한 습관들로 더럽혀지는 일이 없네. 그러므로 독사나 맹호 같이 사람을 헤치는 동물들 또한 번식을 못하는데 강진도 그러한가?
미용의 죄가 나보다 가볍다고 해서 미용을 강진으로 보내고, 나의 죄가 미용보다 무겁다고 해서 나를 흑산도로 유배를 보냈네. 세상에서 사람에 관한 억양(抑揚) ‧ 포폄(褒貶) ‧ 공죄(功罪) 등의 명분과 실제의 잘못됨이 모두 이와 같으니, 나 또한 흑산도로 유배된 것을 어찌 한탄하겠는가.
⌜자산어보⌟에 이어 ⌜표해시말⌟을 지은 정약전
정약전은 ⌜자산어보⌟에 이어 ⌜표해시말⌟을 지은 저자로 유명하다. ⌜자산어보⌟는 흑산도에서 지은 물고기 연구서이지만 ⌜표해시말⌟은 우이도 지은 홍어장수 문순득의 표류경험담을 기록한 글이다. 정약전은 다산의 중형이면서도 ⌜표해시말⌟이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는 단점도 있다. 그것은 유배생활을 하다가 사망했기 때문이다. 만일 정약전 역시 다산처럼 해배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더라면 ⌜표해시말⌟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을지도 모른다. 더구나 문순득이 살고 있는 우이도에서 흑산도로 옮겨 가려했기 때문에 ⌜표해시말⌟이 더욱 상세히 기록하지 못했다는 약점이 있다. 당시 정약전은 우이도에서 지내는 것이 불안해 흑산도로 빨리 옮기려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표해시말⌟은 제3부로 구성되어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기록되었다. 홍어장수 문순득이 유구, 여송, 오문 중국 등 크게 4개 지역을 체류하였고, 동아시아 해양세계에 대한 시대적 기록이라는 점에서 그 가치는 크다. 다른 나라의 기록은 있으나 여송에 대한 기록으로는 유일하고, 조선후기 유구에 대한 문화와 풍속이 상세히 기록되었으며, 특히 선박과 언어에 대해 중요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기록이다. 문순득이 3년 2개월 동안 여러 나라의 다양한 문화와 풍속을 경험한 것도 컸지만 선박과 항해를 경험한 것이 매우 중요했다는 점이다.
문순득의 경험을 토대로 정약전이 천주교의 박해로 인해 유배생활을 하던 중 천주교 문화가 어떻게 확산되고 있는가에 대한 기록도 있고, 국제사회의 항구도시들이 어떻게 다른 항구와 교류를 갖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분석해 놓았다. 따라서 ⌜자산어보⌟에 이어 ⌜표해시말⌟은 정약전의 대표적 작품인 것이다.
이와 같은 소식을 접한 다산은 문순득의 해양경험을 통해 ⌜경세유표⌟를 쓸 수 있었으니 정약전과 다산은 문순득의 해양경험은 대표작의 토대가 될 수 있었다.
희망은 절망으로
정약전에게 아우 다산의 14년 귀양살이가 끝날 수도 있겠다는 희망이 전해진 것은 순조 14년 4월이었다. 정약전은 사헌부 장령이 올린 대계(臺啓)에 다산의 이름이 없었고, 의금부에 해배를 정지하는 명령서를 보내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우 다산이 해배가 되면 곧장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반드시 자신을 찾아올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던 정약전은, 서둘러 흑산도에서 우이도로 거처를 옮기려 했다. 우이도는 흑산도 앞에 있는 섬으로 날씨가 맑으면 겨우 보일 정도로 먼 섬이다. 그런 우이도로 한사코 가려했던 것은 다산을 위해서였다.
“내 아우에게 두 번이나 바다를 건너 나를 보러 오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마땅히 내가 우이도로 가서 아우를 기다리련다.”
흑산도에서 복성재(復性齋)라는 간판의 서당을 열어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했고, 사람들과 허물없이 지냈기 때문에 학자이기에 앞서 다정한 이웃이었던 정약전. 고기 잡는 어부나 심지어는 나무꾼과도 함께 막걸리를 마시며 형제처럼 받아들였기 때문에 모두가 사해형제(四海兄弟)였다. 그래서 정약전이 흑산도에서 우이도로 옮기려고 했을 때 주민들이 가만있질 않았다. 정약전은 흑산도에서 만난 여자와 그 여자에게서 얻은 학소(學蘇)와 학매(學枚)를 태운 채 안개바다를 뚫고 도망치듯 떠났지만 끝내 마을 사람들에게 잡히고 말았다. 한 해가 지나도록 흑산도에 묶여 있던 정약전은 주민들에게 아우 다산을 하루 빨리 만나야 한다며 통사정하고 나서 우이도로 거처를 옮길 수 있었는데, 그러나 의금부의 석방 명령서는 오지 않았고 다산은 해배되지 않았던 것이다.
다산에게 있어 정약전은 한배에서 태어난 형제이기도 했지만 스승처럼 존경했고 가장 자신을 알아주었던 사람이었다. 약전은 ⌜주역(周易)⌟에도 통달했지만 ⌜악기(樂記)⌟에도 높은 수준이어서 다산이 지은 ⌜악서고존(樂書孤存)⌟을 공동으로 저작하기까지 했다. 그래서 더욱 형제애가 남달랐던 것도 사실이었다.
아우 다산을 오매불망 기다리다 죽음을 맞이한 정약전은 참으로 외롭고 쓸쓸한 모습이었다. 왕후장상인들 죽음이 쓸쓸하지 않으랴만 그 많은 형제며 일가친척이 없는 멀고 먼 외딴 섬에서 숨을 거두었으니 나그네처럼 길거리에서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다산은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유월 초엿새 날은 내 어지신 둘째 형님께서 세상을 하직한 날이시다. 오호라! 현자가 그토록 곤궁하게 세상을 떠나시니 그 원통한 죽음은 목석(木石)도 눈물을 흘리지 않고 배길 수 있으랴. 외롭기 짝이 없는 이 세상에서 손암 선생만이 나의 지기가 되어 주셨는데, 이제 그 분마저 잃었으니 앞으로 학문으로 얻어지는 수확이 있더라도 어느 곳에 입을 열어 말할 수 있겠느냐. 사람이 지기가 없다면 이미 죽은 지 오래인 법. 처가 나를 알아주지 않고, 자식이 알아주지 않으며, 형제나 집안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데 나를 알아주는 분이 세상을 떠났으니 어찌 슬프지 않으랴.’
하고 통한의 아픔을 말하기도 했다. 그런데 둘째 형 약전의 장례를 온 섬사람들이 죄 모여 정성스레 치렀다는 소식에 다산은 크게 감격스러워 했던 것인데, 그렇게 되기까지는 홍어장수 문순득의 공이 컸겠지만 살아생전 어부들과 격의 없이 지내오면서 희로애락을 함께 해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사포에 몇 명이 모여서 두보의 시에 차운하다 沙浦小集次杜韻⌟
나그네 두 셋이 가을빛 따라 三兩將秋色來
시 지으며 흥 있으니 재주는 논하지 않네. 詩因遣未論才
서늘한 바람나무에 매미는 여직껏 울고 涼颷在樹蟬猶響
맑은 달빛 가득한 모래밭에 기러기 돌아오려 하네.
淸月盈沙鴈欲回
푸른 산 조그만 집 찬 기운 스며드니
小屋靑山侵席冷
사방 이웃들이 빚은 술잔 건네네. 四隣白酒捧杯催
어린 나무꾼과 늙은 어부들이 기쁜 맘 친구 되니
樵兒釣叟權成友
집집마다 마음껏 웃음꽃 피는구나. 恣意家家笑語開
정약전이 지은 시만 보아도 그가 나무꾼이면 나무꾼, 어부면 어부, 누구나 함께 어울리고 술잔을 건넸다. 그런 정약전이 나이 올해로 쉰 하고도 아홉. 육십갑자 회갑을 넘기지 못한 채 눈을 감고 말았는데 절해고도인 흑산도(黑山島)와 우이도를 오가며 유배생활을 한 지 16년 만인에 순조 16년(1816) 6월 6일이었다.
정약전은 우이도에서 우이도장으로 장례식을 치렀다. 정약전은 살아
생전 많은 시를 지었는데, 그가 16년 동안 살았던 흑산도의 풍광이 절로 떠오르는 것 같다.
⌜소사미 술회(小沙尾述懷)⌟
바다 산이 마치 거미와 같아 海山似蜘蛛
산줄기가 사방으로 달려가네. 支脚走四方
산 계곡은 제각기 조수를 머금고 澗谷各含潮
마른 흙은 다만 봉우리들뿐. 乾土只巒罔
집에 있어도 배 가운데 있는 듯 在家如舟中
머리 들면 싫증나도록 아득한 물. 擡頭厭淼茫
접때 내가 바라본 작은 모래밭은 曩余望小沙
자못 괴로운 마음 견디게 했지. 頗堪紓煩腸
마침내 계고재 노인과 기약을 해서 遂期稽古叟
향기로운 이곳에 놀러 왔다네. 遊賞乃芬芳
맑은 새벽 가파른 산 높고 淸晨後嶻嶭
옷자락은 봄바람에 펄럭거리네. 衣帶春風颺
마을로 들어가니 마음 기뻐져 入洞心近感
단양(丹陽)에 노는 것과 비슷하구나. 髣髴遊丹陽
푸른 산이 좌우를 에워싸고 靑山拱左右
지척에 바다가 감춰져 있네. 溟渤咫尺藏
큰 나무들이 삼오 리 脩橢三五里
시원한 들판도 좋구나. 曠然原隰良
봄 계곡은 수풀에 이어져 있고 春谿絡林薄
흰 바위가 가운데 펼쳐져 있네. 白石羅中央
빽빽한 나무 산계곡을 뒤덮어 密樹衣山谷
사시(四時)에 푸르름 가득하구나. 四時飫靑蒼
이따금 잎 사이로 꽃이 피어 往往葉間花
환하게 단장한 고운 모습 드러내네. 嬋娟露明粧
높이 솟은 문암 바위는 崱屴門巖石
세 봉우리가 우뚝 서서 서로 바라보네. 三峯屹相望
시냇가에서 흰 풀을 깔고 앉으니 臨谿藉白草
술병 또한 그 곁에 있구나. 瓦壺亦在旁
섶을 살라 절인 생선 굽고 燃薪炙鹽魚
샘물 움켜 술 바가지 씻네. 掬泉滌匏觴
이렇게 노는 것이 담박하나 玆遊雖淡泊
그윽한 일 또한 자랑할 만하지. 幽事亦足張
누가 알리오, 한 주먹 안에 誰知一拳內
이 봄 산의 빛을 갖출 수 있음을. 設此春山光
평생 천석(泉石)에 뜻을 두었는데 平生泉石志
넘어져서 시골 바닷가에 떨어졌네. 蹉跌落海鄕
오히려 하늘과 땅의 덕을 입어 尙賴天地德
한 가지에 편히 깃들기를 바랐다네. 一枝冀安康
섬사람들은 토양이 보족해서 島人嗇土壤
손가락만한 땅도 천금처럼 여기지. 寸土如千黃
이 한 구석 황무지를 天荒此一區
남들은 버려도 나는 간직한다네. 人棄我所臧
시냇가에 집짓기 알맞으니 臨流合開軒
두릅나무 베면 들보로 마땅하겠지. 拔棫宜種梁
동산의 연못과 마당의 채마밭 園池及場圃
넓게 깔아놓은 일만 오직 헤아린다네. 布置惟所商
비록 창해 안에 살고 있지만 雖居滄海內
도원(桃源)의 별장으로 물러남이리. 却是桃源莊
모일 때면 의당 읽다 만 책 들고서 會當挈殘書
노닐며 내 생애 마치리로다. 終吾以徜徉 (송하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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