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11년(1787년) 황해도 평산에서 김초동이란 자가 마을의 둑을 쌓는 노역에 동원되면서 같은 마을의 김연석에게 모욕을 당한 적이 있었다. 분을 이기지 못한 김초동이 김연석에게 달려들어 다투다가 도리어 물에 빠져 죽었다. 그러자 그 광경을 지켜보던 김초동의 일가붙이가 복수한다며 김연석을 때려 죽였다.
치욕을 참지 못하고 죽다
사건 조사과정에서 여러 가지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첫째, 김초동이 김연석과 다투다가 화가 나 물에 뛰어들어 자살한 것인지 아니면 김연석이 김초동을 물에 넣어 죽였는지가 분명하지 않았다. 말하자면 자살인지 타살인지가 명백하지 않았다. 타살일 경우 김연석은 사형에 처해질 게 분명했지만 그렇지 않다면 정상 참작이 될 것이었다.
둘째, 김초동의 가족들이 김연석을 때려죽일 때 여럿이 달려들어 구타한지라 주범과 종범을 구별하기 어려웠다는 점이다. 당시 시신을 처음으로 검사한 초검관과 두 번째로 검사한 복검관 모두 김초동의 동생 김큰놈을 주범으로 지목했지만 정황과 증거가 확실하지 않았다. 심지어 몇 번의 조사 결과, 김초동의 부인이 김연석을 물어뜯어 죽게 되었다는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김초동의 가족들이 김연석을 때려죽인 일이 정당하는가?’하는 문제이다. 만일 김초동이 살해된 것이라면 그의 동생 김큰놈의 복수는 정상 참작되어 사형에 처해지지 않을 것이다. 다만 <대명률>에 “죽을죄를 지은 죄인을 사사로이 죽였을 경우 장 일백에 처한다”라는 조문에 따라 처벌되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김초동이 자살한 것이라면 김연석을 죽인 김큰놈은 살인죄로 사형에 처해질 수 있다. 가령 김초동이 자살한 것이라 해도 김연석의 모욕이 자살의 중요한 원인이라면 김초동의 가족들이 ‘김연석에게 복수할 수 있지 않는가.’라는 점이다. 조선 후기에는 욕설이나 다른 요인 등으로 명예를 훼손당한 경우, 수치를 참지 못한 자가 상대를 살해하거나 자살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했고 이에 대해 피해자 가족들이 복수하는 일이 잦았다.
사면령을 내린 정조
사건의 복잡한 조사과정을 지켜본 정조는 다음과 같이 최종 판결했다. “살인사건을 조사할 때 중요한 것은 첫째 살인이요, 둘째 주범이다. 사람을 살리느냐 죽이느냐 하는 문제는 이 두 가지에 달려 있다. 이번 사건은 사망 원인이 매우 복잡하고 주범이 분명하지 않아 네 차례나 조사했는데도 그 때마다 결과가 달라지고 의혹만 늘어났다. 사망 원인은 구타로 인한 것인데, 3차 조사에서는 구타가 물린 것으로 바뀌어 기록되기도 했다. 물린 것이나 구타당한 것이나 그 때문에 목숨을 잃엇다는 결과는 동일하지만, 구타당했다고도 하고 물렸다고도 하니 사건의 정황은 혼란스럽기만 하다. 뿐만 아니라 가슴 부위가 흑색이고 딱딱하게 된 것은 사람을 죽일 정도로 깊은 상처임을 증명하는 것인데, 초검에서는 보이지 않다가 재검에서 갑자기 나타나고 삼검과 사검에서는 또다시 없어졌으니, 검사할 때만다 그 결과가 다르게 나타나고 증거가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주범을 어떻게 결정할지도 모르겠다. 김연석이 한 사람에게만 맞은 것이 아니고,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맞아 왼쪽으로 넘어지고 오른쪽으로 끌려간 것이다. 한데 모여 주먹과 발길질을 했으니, 다섯 사람 가운데 누가 주범인지 알아내기 힘들다. 김큰놈은 김초동의 친동생으로서 고발장에 거론되어 이번 사간의 주범으로 지목되었으나 믿기 어렵다. 설사 김큰놈이 주범이라 하더라도, 김초동이 물에 빠져 죽은 게 분명하고 김연석이 범행을 자수했으니 김초동을 죽인 자는 김연석이 확실하다. 김큰놈은 형의 시체가 물속에 있는 것은 목격하고, 원수가 면전에 있었으니 분한 김에 뒷일을 돌아보지 않고 구타했을 것이다. 법이 있고 없고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본 죄안(범죄 사실을 조사한 보고서)으로 미루어 볼 때 김큰놈에게 가벼운 죄를 주어야 마땅하며, 이는 인정이나 사리를 따져 보아도 실로 용서할 만하다. 물론 황해도 관찰사나 형조 관리 일부는 김큰놈을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이런 경우에는 일상적인 법칙만을 고집할 필요가 없다. <대명률> 또한 참고할 만하니 김큰놈을 석방하라.”
단순 모욕은 복수할 수 없다
나중에 다산은 이 판결을 읽고 기본적으로 정조의 생각에 동의했다. 그는 김연석이 김초동을 물에 빠뜨려 살해한 것이라면 김초동의 동생 김큰놈이 복수하든 김초동의 아내 한씨가 복수하든 상관없다고 보았다. 때문에 다산은 형이나 남편을 살해한 자에게 복수하는 일은 아무런 무제가 없다고 보았다. 심지어 살인사건으로 성립이 되는지조차 의문스러워했다.
“김초동의 사망이 실로 떠밀려 죽은 것이라면 김연석은 당연히 죽어야 할 사람이다. 원한을 품은 가족들이 당연히 죽어야 할 사람을 죽였는데 이를 법에 따라 살인사건으로 간주해 조사했으니 합당한 일인지 모르겠다.”
하지만 김연석에게 모욕을 당한 김초동이 수치를 참지 못하고 물에 뛰어들었다면, 즉 자살이라면 어찌할 것인가? 이럴 경우 다산은 “김초동의 가족들은 복수할 수 없다”라고 잘라 말했다. 다산은 아버지의 살인범을 자식이나 아내 혹은 동생이 복수할 수 있다고 인정했지만 단순한 모욕으로 인한 자살마저 복수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사실 모욕은 복수를 불러일으키는 가장 원초적인 감정이며, 고대 중국의 경전 <주례>에도 이와 연관된 정당한 살인을 언급한 바 있다. 이후 과연 정덩한 살인이 무엇인지 설명하려는 시도들이 뒤따랐다. 후한의 정현은 ‘부모나 형제 혹은 사장(社長 스승이나 지역공동체의 장)을 모욕한 자를 복수 살해한 행위야말로 정당한 살인이라고 보았다. 그 뒤 당나라의 가공인은 “고대에는 사람들이 매우 순박해 수치를 안겨준 상대를 죽일 수 있었다”라고 해석했다. 마음이 순수했던 고대인들에게는 모욕이 매우 큰 상처가 되었기 때문에 모욕한 자를 살해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조선시대 사람들 역시 모욕한 자를 복수 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모욕을 주었다고 해서 살해당할 수 있다면 얼마나 위험한 사회인가? 단지 부모를 욕했다고 해서 효를 이유로 상대를 죽인다면 사회질서가 어떻게 유지되겠는가? 다산은 정현과 가공인의 해석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그리고 모욕이나 수치는 상대를 죽일 수 있는 정당한 살인의 조건에 들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다산은 복수 행위를 제한하고자 했다. 복수에 해당하지 않는데도 복수한다는 명목으로 사람을 죽인 뒤 자신의 행위가 정당하다고 주장하는 자들을 처벌함으로써, 모든 폭력 행위를 정당화하려는 시도를 저지했다. 그렇다고 다산이 모욕을 인내하고 굴종을 강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정의로운 살인의 가능성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진정한 정의에 기초한 살인은 가능하지만, 그렇지 않는 경우라면 그 어떤 형태의 폭력도 정당화될 수 없다는 것이 다산의 법정신이었다. 이는 진정한 분노와 편협한 울분을 구별하려는 의지와 무관하지 않았다. 다산의 이러한 생각은 다음 최 여인 사건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다음호에 계속> <정약용, 조선의 정의를 말하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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